2011년 3월 26일 토요일

무림드래곤

젠장!"
  한 여인이 사정없이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아니, 그는 여인이 아니었다. 단지 여인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 서둘러 한 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흑발과 흑안과 잘 어울리는 검은 강기가 그곳으로 날아갔다.
  쾅! 하지만 강기의 힘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또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내였다.
  "씨발!"
  욕이 좀 심했다.
  그의 이름은 하유현. 무림 최강의 집단인 마교의 어엿한 소교주였다. 어릴 적 힘든 삶 때문에 다소 거친 말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릴 적 마교의 교주의 눈에 띄어 이렇듯 마교주의 소교주가 되었다. 무공의 재능은 남달랐기에 마교의 교주의 아들까지 뛰어넘어버린 유현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마교가 힘을 숭배하는 집단이라 하나 유현을 배척하는 집단이 많았다.       마교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며 현 마교 교주의 아들인 사무연도 인정한 유현을 배척해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유현은 장로들을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씹새끼들, 걸리기만 해봐라! 완전 아작을 내버릴 테닷!'
  유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날렸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해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아무리 천재에다 소교주라 하지만  유현은 아직 24세의 젊은 사내였다. 게다가 외모를 보자면 손은 여자의 그것처럼 고왔으며 얼굴선과 이목구비는 여자의 그것처럼 아름다운, 너무도 아름다운 하유현. 그가 달리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유현에게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 있는지 몰랐기에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에 들리는 유현의 섬뜩한 웃음을 듣고 그대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킥킥킥킥, 병신들."
  툭!
  투두두두둑!
  10명 정도의 추적자들의 목이 머리에서 떨어져 내렸다. 천잠사... 유현이 그것을 이용해 30명 정도의 추적자 중 3분의 1, 즉 10명에 해당하는 이들의 목을 따버린 것이다.
  "킥킥킥, 나 혼자 죽을 수야 없지. 와라! 걸리는 놈은 다 세상 하직시켜주마!"
  그리고 기세를 뿜는 유현이였다. 마교의 추척자들은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마교의 소교주는 괜히 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유현... 게다가 내공도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로웠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직면한 자의 여유로움일까?
  하지만 여유로운 것과 달리 속은 그렇지 않았다.
  '크흑, 여기서 끝인가? 무연 형, 혈사 아저씨... 저, 여기서 죽습니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교주 사혈사. 그들을 생각하니 유현의 눈가에 언뜻 슬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침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하는 유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미인도에서 툭 튀어나온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추적자들도 그 모습에 움찔했다. 무림오화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유현이다. 남자라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유현의 외모는 인간의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꼭 선녀가 강림한 것 같은 얼굴이랄까?
  그러나 정작 유현은 이런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각이 전혀 없었다. 추적자들에게서 빈틈을 발견한 유현이 소리쳤다.
  "빈틈이닷!"
  촤악!
  분명 추적자를 베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어가는 자는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그것에 기가 질리는 유현이었다. 아무리 살수들이라지만 어찌된 것들이기에 죽을 때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단 말인가!
  유현은 질린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 자신의 뒤를 덮치는 이에게 뒤차기를 작렬시켰다.
  퍽!
  그리고 옆을 베어오는 이의 목을 깔끔하게 그어버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현의 발악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푹!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오는 검을 쳐다보며 유현이 말한다.
  "이런 씨발!"
  역시 입에 달린 욕이라 죽음과 직면했을 때도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유현을 살수들은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살수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 유언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유현이 살수의 우두머리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내가 다시 환생한다면..."
  유현은 그렇게 말한 뒤 화사하게 웃으며 말한다.
  "장로들 목을 다 따버리겠다고 전해줘."
  그 말을 끝으로 유현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 유현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살수들의 우두머리가 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그들은 유현의 시신을 처리하지 않았다. 죽이라고 했지, 시신까지 처리하라는 명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대로라면 시신을 처리했겠지만 장로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추적자들은 유현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했다.
  다음날, 유현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연은 큰 충격에 빠졌다. 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연은 자신이 친동생처럼 아끼던 유현의 죽음을 믿지 못했고, 혈사는 친자식 같은 유현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능지처참 시켜버렸다.
  그렇게 마교에 피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조용히 웃고 있는 듯한 유현의 시신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다.
    에이라나
  어느 깊숙한 산맥의 한 동굴.
  그곳의 마른 풀 더미에 아름다운 은빛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기로 따지면 성인 남자만 하다고 할까?
  자연산 동굴로 보이는 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알. 그 옆에서 어느 한 거대한 존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를 가진 존재가 불안한 듯 말한다. 놀랍게도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곱디고운 미성으로.
  "왜 부화하지 않는 거지?"
  부화할 시간이 이틀이나 지났는데 부화하지 않는 자신의 알을 보는 그 존재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거칠 것이 없을 것 같은 존재가 불안한 눈으로 알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유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좆같은! 여긴 도대체 어디야?'
  사실 배에 검이 꽂힌다고 해도 바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검에 독이 발려 있었다면? 그나마 자신에 대한 예의로 고통 없이 바로 죽는 독이라서 다행이었다. 아직 만독불침의 몸이 아닌 그는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가?'
  분명 자신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운이 좋아 살았다고 하자. 하지만... 하지만 왜 갑갑한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쓰펄! 욕 나오네.'
  성격 하나는 절대 좋지 않은 유현이었다. 유현은 속으로 자신이 아는 욕이란 욕은 다 내뱉고 있었다.
  '뭐, 그렇다 해도 장로들의 목을 딸 수 있는 기회는 생겼군.'
  유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장로들을 처절하게 척살하리라. 유현은 섬뜩하게 웃다가 곧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이런 개 같은 곳에서는 빨리 나가는 게 좋겠지?'
  유현은 몸부림을 쳤다. 자신의 모든 신체부위를 이용해 지금 자신을 가두고 있는 이 단단한 것들을 부수려 했다. 그건 본능적인 발버둥이었다. 유현은 내공을 사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쩌적!
  얼마나 몸부림쳤을까? 그는 자신을 감싸는 것의 표면에 금이가는 것을 느꼈다.
  '후후후... 지 까짓 게 감히 나를 가둬두려고 해?'
  의기양양해진 유현은 거칠 것 없이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쳤다. 그러다 마침내...
  쩌적, 쩌저저저저저적!
  드디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완벽하게 부서지자 빛을 볼수 있었다.
  '오! 역시 사람은 빛을 보고 살아야지, 어둠의 자식처럼 살면 안 된다니까? 나처럼 착한(?) 사람은 더더욱!'
  유현은 마교의 소교주에다 어둠의 자식이라 불릴 만하며, 절대로 착한 인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현은 만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몸이 불편하다. 그래서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데...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지금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이 은빛 비늘들은 뭐?
  "팔면 비쌀까?"
  아무튼 멍하니 중얼거리는 유현의 입에서 생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으에에에에엑! 이게 뭐얏! 말도 안 돼!"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었다. 그래, 당장 죽어도 둘러볼 틈이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은빛 비늘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현은 은빛 바날에 감싸인 짧은 팔과 짧은 다리, 육중한 몸, 그리고 오감에 느껴지는 등 뒤와 엉덩이 쪽에 붙은 이상한 것. 분명 자신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곧 유현을 정신적 공황 상태로 몰고 가기 충분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감싸고 있었던 것을 쳐다보았다. 분명 알의 껍데기와 비슷하게 생겼다.
  "허허... 나, 나 마물로 환생한 건가?"
  유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절규했다.
  "하늘이시여!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따위 마물로 태어나게 하십니까!"
  유현의 절규가 동굴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 까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절규만 해댈 뿐이었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착하게 살아왔는데! 말도 예쁘게 하고(이건 절대 아니다) 불쌍한 사람 있으면 도와주고(도리어 괴롭혔다), 나를 건드리는 것들도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고(거의 다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얼마나 착하게 살아왔는데(그는 근본적으로 착한 것과 나쁜 것의 기준을 몰랐다)!"
  그렇게 되지도 않는 뻥을 지껄이응 유현. 그는 그렇게 계속 절규만 할 뿐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장로들에게 복수해야 하는데 도리어 환생이라니! 그것도 이 따위(?) 마물로!
  "크아아아악! 말도 안 돼!"
  유현은 크게 절규할 뿐이었다. 이 따위 일은 절대 입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발광을 했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지어내고 있었다. 누군가 봤다면 한 대 치고 싶어질 것이다.
  유현은 절규에 슬슬 욕이 붙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좆같은 개XXX같다! 이런 개XXXXX!"
  아무리 생각해도 상당히 욕을 잘하는 유현이었다.
   *   *   *
  에랴나니스. 그녀는 드래곤 실버 일족의 3,579세의 여성 드래곤이었다. 몇 년 전 블랙드래곤 일족의 카랴만에게 청혼을 받은 그녀는 얼마 후 알을 낳게 되었다.
  그때 카랴만과 크게 싸운 에랴나니스는 카랴만을 레어에서 추방(?)시킨 다음 자신 혼자 알을 돌보고 있었다. 가끔씩 카랴만이 찾아왔지만 절대 용서해주지 않고 알도 보여주지 않는 그녀였다.
  물론 그런 그녀의 행동에 카랴만은 침울해졌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아이도 못 보게 생겼으니 말이다.
  아무튼 카랴만은 일단 넘기고...
  그녀는 이틀 전부터 고민거리 하나가 생기고 말았다. 고민거리는 바로 자신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돌보던 자신의 아이가 들어 있는 알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은 부화하지 않았다.
  부화할 시간이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부화하지 않는 알 때문에 그녀의 걱정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알을 계속 쳐다보다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인간으로 폴리모프해 레어 부엌(이런 거 있는 레어는 참 드문 일이다)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쾅!
  컵을 탁자에 거세게 내려놓은 에랴나니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이야, 아이야, 나의 첫 아이야, 왜 부화하지 않니?"
  생각만 해도 근심이 절로 생겨나는 자신의 첫 아이였다. 그녀는 머리를 잡고 한숨을 푹 쉬었다. 저대로 죽으면 새 생명이 너무도 불쌍했다. 물론 그 감정을 느끼는 대상은 오직 드래곤들뿐이다. 다른 생명이야 죽든 말든 드래곤들에게는 드래곤만 중요할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 그녀의 귀에 무언가가 소리치는 것이 잡혔다. 의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때 무언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랴나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것은 분명...
  "용언?"
  용언이었다. 드래곤들이 평소에 대화할 때 쓰는 기본적인 용언. 그것이 지금 레어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는 것은...
  "설마... 알이 부화했나?"
  에랴나니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자신의 아이가 부화한 것이다. 그것에 그녀가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크아아아악! 말도 안 돼!"
  선명하게 들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절규 그 자체였다.
  '혹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당황한 에랴나니스는 다급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만약 아이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면 이건 상당히 큰 문제였다. 그렇게 다급하게 뛰어가는 에랴나니스의 귀에 또 자신의 아이로 추정되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몸을 굳게 만들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런 씨발! 좆같은 개XXX같다! 이런 개XXXXX!"
  저런 욕 다방은 꽤 오랜 세월을 살며 별별 꼴을 다 본 그녀로서도 처음이다. 그렇게 멍하니 굳어 있는 에랴나니스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아이의 욕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   *   *
  유현은 자신의 머릿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욕을 하나하나 꺼내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었다.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떄 뭔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다다다!
  그것에 의아해하며 소리치는 것도 잊은 유현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몸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은빛 머리칼의 여인이 보였던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고 마는 유현. 은발의 여인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장난이 아니였다. 그것은 자신의 양아버지인 사혈사와 거의 비슷한 기세였다.
  이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유현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사혈사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숨기고 있는 힘은 더욱 강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아무리 미물로 태어났다지만 그래도 살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 아니겠는가? 하지만 유현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을 포기했다. 지금 자신에게 달려오는 은발의 미녀는 강했다. 아직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유현은 모든것을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그게 가장 좋을 듯 했다. 어차피 자신 같은 괴물을 본다면 그녀는 필시 자신을 죽일 것이 뻔했다. 한 번 죽었던 몸, 다시 죽는 것은 두렵지않았다. 그저 아프지 않기만을 빌 뿐.
  어느새 그녀가 자신 앞으로 다가왔다.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시선만이 느껴질 뿐.
  그는 의아해서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을 보며 행복한 표정으로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 때문에 어리둥절해진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뜰 때였다.
  "부화하지 않아서 걱정했단다, 아가야."
  그녀는 유현을 품에 꼭 안았다.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유현이었다.
   *   *   *
  에랴나니스는 너무도 기뻤다.
  올 때까지만 해도 불안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아기가 멀쩡했다. 왜 소리를 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사한 것을 알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랴나니스를 기쁘게 한 것은...
  '아름답다.'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아이는 보통의 해츨링과는 달랐다. 아이는 말로 허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특히 비늘이 유난히 빛나는 듯 했다. 에랴나니스는 자신의 아이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드래곤 일족 중 가장 아름다운 일족을 뽑으라면 그 누구라도 실버 일족을 뽑는다. 그들의 은빛 비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신성제국에서 성수로 숭배를 받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들이 바로 실버 일족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는 그런 보통(?)의 실버 일족들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에랴나니스는 자신의 아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부화하지 않아서 걱정했단다, 아가야."
  자신의 아이가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의아하게 생각한 에랴나니스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아가야?"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자신의 아이는 너무도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에랴나니스의 몸을 굳게 만드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왜 저 안 죽여요?"
  쩌적!
  그 순간 에랴나니스는 돌이 되고 말았다. 물론 유현은 자신을 안 죽이는 에랴나니스가 고맙기는 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어리둥절했다. 전에는 몰라도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녀에 비한다면 괴물 그 자체가 아닌가.
  잠시 굳어 있던 에랴나니스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장난은 그만 하려무나, 아가야."
  그렇게 말한 에랴나니스는 자신의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마주하며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너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죽이니?"
  그 순간 유현의 얼굴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 에랴나니스. 그다음 이어진 말에 유현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리고 말이다, 내가 네 엄마라도 헤츨링을 죽이면 난 세상 하직이란다. 넌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니?"
  그 말에 유현은 또 한 번 몸이 굳고 말았다.
  '엄마? 누가? 눈앞의 여인이?'
  쩌적!
  입을 쩍 벌리는 유현. 하지만 그런 유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에랴나니스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조금 '특별하다'라고 생각하며 유현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아가야, 그렇게 멍하니 있다 입에 벌레 들어간다?"
  그 말에 부리나케 입을 닫는 유현이었다. 아무튼 눈앞의 여인이 자신의 엄마란다. 그렇다면 부모라는 뜻인데... 이유는 알수 없지만 부모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유현이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어미라 칭하는 여인의 품에 있으니 잠이 왔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다는 듯 여인은 유현을 쓰다듬어주었고, 유현은 그런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점점 잠의 나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유현은 완전히 잠들었다.
   *   *   *
  유현은 눈을 떴다. 역시 혼란스러웠다. 어제 자신은 이상한 생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한 여인이 나타나 자신을 그녀의 아이라 칭했다. 그래서 더더욱 혼란스러운 유현이었다.
  한숨을 푹 쉰 유현은 마른풀 위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눈과 마주쳤다.
  '헙!'
  깜짝 놀란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 눈이 조심스럽게 휘어지며 살포시 웃는다. 유현은 그것이 자신과 같은 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은빛 눈동자에 자신과 같은 은빛 비늘. 거대한 덩치의 무언지 모를 생물. 어떻게 봐도 몸의 일부분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는 유현이었다. 그것은 흡사 책에서 읽었던 용과 유사해 보였다. 아무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유현의 말을 받아주는 눈앞의 존재였다.
  "후후. 고맙다, 아가야."
  어제 들은 고운 미성.
  그것이 눈앞의 거대한 존재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유현은 경악했다.
  "어어, 어?"
  '어어'를 계속 발음하는 유현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왜 엄마를 보며 그렇게 놀라니?"
  '컥! 이 거대한 존재가 어제의 그 아름다운 여자?'
  깜짝 놀란 유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느껴지는 기운도 비슷했다. 그리고 자신의 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과도 비슷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유현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엄마?"
  유현은 전생에 고아였다. 10살까지 고아로 살며 수도 없이 '나는 왜 버려졌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또한 그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엄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단어를 무의식중에 저 거대한 존재에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유현은 그걸 깨달을 시간이 없었다. 은빛 눈동자가 잠시 동그랗게 떠지더니 부드럽게 휘어지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왜 부르니, 아가야?"
  이에 유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눈앞의 존재를 '엄마'라고 불렀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꼬르르르르륵!
  유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꼬르르르르륵' 소리가 나는 거야!'
  유현은 고개를 숙이며 창피해했지만 이내 창피함보다 더한 배고픔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고파."
  정적.
  그리고 잠시 후.
  "풋!"
  그 말에 그의 엄마라는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하!"
  마음껏 웃어대는 그녀를 보며 유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진지하게 부른 것치고는 조금 웃기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배가 고플 게 뭐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유현을 향해 웃음을 그친 그의 '엄마'가 말했다.
  "후아... 하긴, 원래는 태어나자마자 배가 고파야 하는데, 어제 그렇게 잠들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군. 우웅, 잠시만 기다려보렴."
  그렇게 말한 에랴나니스는 잠시 기운을 끌어올리더니 유현이 그 기운을 느끼기도 전에 눈앞에 웬 고기를 덩그러니 선보이는게 아닌가! 그것도 엄청 커다란 생고기!
  그것을 빤히 쳐다만 보는 유현이었다. 저걸 먹으라고? 아무리 고아로 살았지만 '생고기'는 먹어보지 못한 유현이었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는 게, 지금 그의 배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기대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엄마 때문에 유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마 드래곤이 마법의 종족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아니 이 세계에 마법이 존재하고 그 마법이라는 것이 불을 만드는 것을 알았더라면 유현은 눈앞의 생고기를 구워달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생고기를 먹는 유현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에랴나니스였다. 유현은 생고기를 먹고 난 후 드래곤인 만큼 바로 이따위 생각을 했다.
  '먹을 만한데? 음, 맛있당!'
  적응력 하나는 끝내주는 유현이었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앞의 성인 크기만 한 생고기 덩어리를 다 먹어치웠고, 그것을 만족스럽게 쳐다보는 에랴나니스였다.
  식사를 마친 후 유현의 입가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에랴나니스는 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클린' 마법을 이용해 그것을 없애버렸다.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거 뭐야?"
  "응?"
  자신의 아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되묻는 에랴나니스. 그리고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유현이 다시 물었다.
  "방금 번쩍한 거."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아직 해츨링의 몸이다. 그렇기에 감각이 많이 무뎌진 유현이었다. 에랴나니스는 그런 유현을 보며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마법."
  "마법?"
  "어머? 혹시 마법을 모르니?"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랴나니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에 유현이 찔끔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아."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무리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됐다지만 마법을 모르면 어디 드래곤이라 할 수 있겠니?"
  그리고 에랴나니스는 유현에게 마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유현은 그것을 듣고 경악했다.
  '헉! 사술? 아냐, 사술 같은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아직 마나를 잘 느끼지 못하는 해츨링의 몸이라 유현은 답답했다. 아무튼 드래곤의 몸이 영혼과 동화되어 머리도 엄청 좋아진 유현이 물었다.
  "어제 인간으로 변한 것도 마법?"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생극 웃으며 말한다.
  "그래, 보통 100살 정도 되면 마법을 쓸 수 있으니 그때까지 참으렴, 우리 아가."
  아무튼 그 말에 유현이 경악했다.
  '배, 백 살?'
  그러고 보니... 엄마의 나이는 몇 살일까? 유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엄마는 몇 살이야?"
  "3,579살이란다."
  그 말에 유현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어떤 종족일까? 드래곤은 만 년의 수명을 가지며 13서클의 마법까지 허락된 존재다. 5천살 이후부터는 10서클의 영역과 용언 마법을 허락받은 지상 최강의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다. 천 살만 넘겨도 지상에서는 거의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가 바로 드래곤인 것이다.
  하지만 무림에서 살았기에 이런 것을 알 리 없는 유현은 그렇게 속으로 고민 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로부터 사흘 정도가 지났을까?
  유현은 걸음마 연습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 빨리 많은 것을 하고 싶었다. 백 년 후에야 사람의 몸을 가질 수 있다고는 하나 이 몸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렇기에 일어서는 연습을 먼저 시작했다. 물론 엄청 굴렀다.
  무게 중심이 인간과 다른 신체 구조상, 인간의 몸에 익숙한 그로써 드래곤의 몸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거의 3시간 정도 구른 후에야 타고난(?) 감각에 의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유현이었다.
  '큭큭큭, 이 따위 걷는 일쯤은 금세 끝내 버릴 수 있어!'
  그 날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엄청 넘어지고 구르는, 영광의 드래곤이라면 누구에게나 행해지는 일을 당해야 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당당하게 레어를 걸을 준비를 하는 유현을 막아서는 존재가 있었으니,
  "아가야, 오늘은 외출이다."
  이렇게 말하고 바로 인간의 몸으로 폴리모프한 에랴나니스가 달려와 유현을 안았다. 레어를 돌아다니던 유현은 의아해하며 말했다.
  "왜? 어디 가?"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활짝 웃으며 말한다.
  "어디긴~ 당연히 이름 받으러 가야지."
  그렇게 말한 에랴나니스는 자신의 아이를 추스른 다음 바로 워프를 했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새로 태어나서 이상한 일은 여러 번 겪은 유현은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여긴 중원 어디쯤일까?'
  물론 그의 생각과 달리 중원 따위는 없었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니까. 이곳은 리샨 대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현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유현과 에랴나니스가 떨어진 곳(표현이 좀 그렇다)은 바로 드래곤 일족의 수장 드래곤 로드의 레어였다.
  그곳에는 많은 드래곤들이 모여 있었다. 아니, 거의 모든 드래곤이 집합해 있었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뼛골에 박힌 드래곤이라도 해츨링이 탄생했을 때는 모두 모이는 그들이었다. 심지어 유희까지 파토내고 날아온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해츨링의 탄생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한 이들은 유현이 속해있는 실버 일족이었지만.
  아무튼 100년 만에 태어난 유현을 축하해주는 이들이었다.
  이것으로 해츨링의 수는 모두 아홉. 가장 나이가 많은 해츨링이 347세인 것을 보면 최근(?) 들어 다닥다닥 많이도 태어난 것이다. 이번 대는 무슨 일이 있나보다. 발정기?     
  잡설이 길었다. 각설하고.
  아무튼 전 드래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한 에랴나니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는 유현. 아직 어린 해츨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유현을 보며 모두 탄성을 질렀다.
  에랴나니스는 그들의 반응에 즐거워 싱글벙글했다. 아무리 어미들은 고슴도치라 해도 제 새끼가 예쁘다지만 이 아이는 그런것을 배제하고 보아도 너무도 아름다웠다. 에랴나니스는 드래곤 일족의 로드에게 인사를 했다.
  "로드, 저 왔어요."
  아무리 드래곤 로드의 레어가 크다 한들 모든 드래곤이 모이려면 모두 폴리모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인사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드래곤 로드 그라나스론이었다. 그는 골드드래곤이었다.
  그녀의 인사에 그라나스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름다운 아이가 태어났구나."
  자신의 아이를 보며 웃는 금발의 사내에게 에랴나니스는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호호호, 누구 아인데 아름답지 않겠어요? 하는 짓도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러면서 눈을 감고 있는 유현의 볼을 콕 찔렀다. 한 달 동안 봐왔는데도 귀엽기만 한 아이였다. 레드 일족의 최고령자이며 에랴나니스의 어머니인 레랴나스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 아름다운 아이구나. 성룡이 되면 그 아이를 가지고 싸우지 않을까 걱정되는군."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어머니? 호호호호!"
  '엄마의 어머니?'
  유현은 가만히 감고 있던 눈을 떠 자신의 할머니인 붉은 머리의 붉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맞아? 엄마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듯한데.'
  드래곤에 대한 지식이 제로인 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할머니?"
  그러자 레랴나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곱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네 할머니란다."
  에랴나니스에게 다가가 유현을 건네받는 레랴나스였다.
  '헤~ 이분이 내 할머니?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이렇게 젊은 사람이 내 할머니라니.'
  그렇게 유현이 감탄하고 있을 때 자신의 어머니인 에랴나니스와 같은 은발에 은안을 가진 남자가 갑자기 그를 안아들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녕? 내가 네 할아비란다."
  유현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도 젊네.'
  과연 유현이 드래곤에 대한 종족을 제대로 이해하는 날이 언제일지 참 궁금했다.
  엘란카넌은 씨익 웃으며 유현을 던지고 받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종내는 눈앞이 어질어질한 유현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레랴나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남편의 손에서 유현을 빼앗았다.
  "그만해요, 엘란카넌. 애가 어지러워하잖아요."
  그러자 엘란카넌이 말했다.
  "미안하오."
  그렇게 시작된 가족과의 만남. 하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부재에 관한 것이었다. 유현이 그렇게 고심하고 있을 때,
  "하하! 안녕, 아가야?"
  흑발에 흑안으로 중원을 그립게 만드는 남자가 다가왔다. 그 미남자의 등장에 유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스플로젼 프레임 볼!"
  쾅!
  "으갹!"
  남자가 갑자기 날아온 마법에 경악하며 그 마법을 피했다. 그 남자가 서 있던 자리는 움푹 파여 있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에랴나니스, 날 죽일 작정이야?!"
  "그래. 차라리 죽어라, 죽어!"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 에랴나니스는 자신의 어머니의 품에서 유현을 받아 안으며 말했다.
  "아가야, 저 검둥이 도마뱀은 무시하렴.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작자란다."
  그러자 성질 급한 블랙 일족답게 그가 버럭 반발했다.
  "크악! 난 걔 아버지야! 상관없다니!"
  땡고함을 지르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에랴나니스는 다시 유현을 보며 말했다.
  "아가, 무시하렴, 늙어서 노망난 거야. 드래곤도 살짝 미치는 작자가 몇 있거든?"
  "커억!"
  에랴나니스의 독설에 카랴만은 뒷목을 잡고 넘어졌다.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유현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엄마의 성질이 한 가락 하며, 절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유현은 깨닫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천사 같은 엄마지만.
  같은 남자라서일까, 동정심이 깃든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는 유현. 그런 유현을 본 에랴나니스가 못을 받았다.
  "저 따위 작자를 아비라고 생각하면 네 인생에 방해만 된단다. 알았지?"
  끄덕.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그의 엄마는 대단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어느 편에 붙는 게 이득인지를 파악한 그 역시 대단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해프닝이 있은 뒤 에랴나니스는 유현을 레어 구석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곳에는 십대 중후반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유현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11명이었다. 유현은 그런 그들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때 금발에 금안을 가진 한 여자 아이가 말했다.
  "에랴나니스, 얘가 이번에 태어난 에랴나니스의 아이에요?"
  "응. 이쁘지?"
  유현은 '예쁘다'는 말에 슬쩍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냥 잠자코 있었다. 에랴나니스의 말에 금발에 금안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진짜 예쁘게 생겼네요? 태어난 지 한 달 된 애 맞아요?"
  "그래."
  에랴나니스는 생긋 웃은 뒤 유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엄마는 어른들과 네 이름을 지을 생각이니 여기서 놀고 있으렴."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랴나니스가 나가자 유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있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들은 모두가 감탄이 나올 만큼 예쁘게 생긴 아이들뿐이었다.
  '내 전생의 외모와 비할 바 못 되지만. 캬캬캬캬캬!'
  진정 '천상천하유아독존'인 유현이었다. 유현이 속으로 웃고 있을 때 한 소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이번에 태어났다는 꼬맹이냐?"
  적발에 적안을 가진 소년.
  유현은 꼬맹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뭐하는 놈이냐?"
  그러자 적발에 적안을 가진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잠시 큭큭거리더니 말했다.
  "훗,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 된 주제에 꽤 맹랑한 꼬마네?"
  말싸움으로 유현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걸까? 유현은 그렇게 웃는 소년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전생에도 유명했던 그의 독설이 슬슬 발동하고 있었다.
  "그럼 넌 몇 살이나 처먹었기에 그렇게 잘난 체하냐?"
  "컥!"
  도대체 말투가 뭐 저렇단 말인가? 소년의 이마에 빠직 십자마크가 생겨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217살이다."
  그러자 유현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한다.
  "나이 많이 처먹어서 좋겠수?"
  태어난 지 이제 겨우 한 달 된 해츨링 주제에 저 삐딱한 말투라니. 소년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이 꼬맹이가 진짜 죽으려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레드 일족답게 성격이 좋지 않은 그였다. 하지만 성격 안 좋은 걸로 따지자면 유현이 그보다는 한수 위였으니.
  "씨발, 지랄하고 앉았네!"
  "컥!"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엄청난 욕설에 가슴을 부여잡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결정타를 날리는 유현이었다.
  "저기 찌그러져 있어, 나이 값도 못하는 새끼."
  "커억!"
  유현의 아름다운 외모와 신랄한 말투에 재기불능이 되어버린 217세 레드 일족의 소년 레니스였다. 레니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가서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땅으 긁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런 레니스를 쳐다보는 나머지 10명.
  도대체 태어난 지 한 달 된 녀석의 말투가 왜 저렇단 말인가? 그의 엄마도 만만찮은 성격을 지녔지만 그 유전이라기엔 너무 강렬하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삐딱한 표정으로 10명의 드래곤들을 쭉 보다가 구석에 가서 누웠다.
  그때 또다시 적발에 적안의 소년이 다가왔는데 그는 레니스는 아니었다. 그는 유현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 말했다.
  "안녕? 난 레드 일족의 547살 먹은 성룡 카라나스야. 잘 부탁해."
  그렇게 자신에게 생긋 느끼하게 웃어 보이는 카라나스를 보며 유현이 말했다.
  "느끼합니다. 얼굴 치워주세요."
  "흐응!"
  그는 유현의 말에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유현을 쳐다보았다. 조금 얌전해진 유현을 느낀 것일까? 아까 에랴나니스에게 말을 걸었던 금발에 금안을 가진 골든 일족의 크리스란이 말했다.
  "으응. 일단 소개부터 할게. 난 골든 일족의 성룡 크리스란이야. 나이는 571세로 성룡이 된 지 71년이 지났지. 그리고 여기 이 레드 일족의 녀석은 카랴나스. 말한 대로 547살, 성룡이 된지 47년이 지났어. 여기 있는 블루 일족의 남자애 블리켄은 531살이야. 우리 셋은 친구야."
  아직 600살이 되지 않은 이들이 소개한 크리스란. 그녀는 본격적으로 해츨링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기 그린 일족 녀석의 이름은 라이탄. 347살로 해츨링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아. 그리고 저기 블랙 일족의 녀석은 321살로 이름은 리얀이지."
  그리고 이어진 설명은 나이 순서대로였다. 일단 라이탄의 성별은 남자였고 리얀은 여자였다.
  "저기 너와 같은 실버 일족인 카타란은 274세, 그리고 저기 나와 같은 골드 일족인 로리나스는 251세. 그리고 저기 조금 전 네가 녹다운 시켜버린 녀석은 레드 일족의 레니스, 저기 블루 일족의 녀석은 카라넴. 나이는 189살. 저기 초록색의 머리를 가진 녀석은 랸 157세, 마지막으로 딱 100살인 카리칸 보다시피 레드 일족이지."
  크리스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이었다.
  "네, 그렇군요."
  해츨링들은 모두 다섯명이 남자고 세 명이 여자였다. 성의 없이 대답한 유현은 노골적으로 관심 없다는 표시를 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짜증스럽게 다시 눈을 뜬 유현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갑자기 카라나스가 자신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찡그리는 유현에게 카라나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너처럼 아름다운 해츨링은 처음 봐. 뭐, 내가 본 해츨링은 30명도 안 되지만 그중에 네가 제일 아름다워. 난 네가 마음에 들었어. 넌 내가 찜한 거야."
  그 말에 유현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유현은 남자니깐!
  "씨발, 미쳤냐?"
  "잉?"
  유현의 거친 말투에 카라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카라나스를 보며 유현이 거칠게 말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져!"
  그나마 존대하던 말투도 없어졌다. 그런 유현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라나스였다. 한 달간 도대체 뭘 먹고 컸길래 무슨 말투가 저렇단 말인가?
   *   *   *
  유현이 뭐라 떠들든 말든 지금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곳이 있었으니...
  쾅!
  "아니! 무슨 소립니까? 그 아이는 저희 아이라구요! 왜 레드일족에서 관여해요!"
  "어허! 그래도 그 아니는 레랴나스 님의 딸인 자네의 아이가 아닌가? 우리에게도 그 권한이 있어."
  "그렇다면 그의 남편이자 그 아이의 아버지인 카랴만이 블랙 일족이니 레드 일족보다 우리의 발언권이 훨씬 강하겠군!"
  "뭐라? 이놈의 깜씨들이 죽을래?"
  "웃기지 마! 이 시뻘건 것들! 너희나 죽어버려!"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레드 일족과 블랙 일족. 그리고 그 광경에 한숨을 쉬는 드래곤 로드.
  각 일족에서 이름을 만들어 고집을 하고 있었고, 그 틈에서 에랴나니스는 꼭 '레닌'이라고 지어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레드 일족에서는 '카리아네니', 블랙 일족에서는 '다카나하', 실버 일족에서는 '레디아느',     블루 일족에서는 '케니아크', 그린 일족은 '아라나칸', 골드 일족은 '에랴난', 그리고 어머니인 에랴나니스는 '레닌'.
  그중 블랙 일족과 레드 일족의 싸움이 유난히 심했다.
  "크악! 이 불에 덴 도마뱀들!"
  "웃기지 마! 때 한 번 안 민 도마뱀!"
  “우린 원래부터 이래!"
  "조상대대로 더러웠나 보지?"
  "캭! 다시 말해봐!"
  "조상대대로 더러웠지? 됐냐?"
  "이것들이 진짜!"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있을 수 없었다.
  어느새 마법까지 남발하며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 있는 물건 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기까지 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다는 듯이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차 맛이 좋군요, 로드."
  "레랴나스, 그렇지요? 흠, 카랴만 자네는 어떤가?"
  "정말 좋군요. 차 이름이 뭡니까?"
  "이건 '나라인'이라고 하네."
  "흠, 좀 얻어 가면 좋겠군요."
  "사위, 내 딸 성격이 개떡 같아서 그러니 용서하게."
  "하하! 장인어른, 그건 다 알고 있으니 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평화롭다.
  로드는 완전히 싸움판인 곳에 신경을 끊고 여유롭게 이 상황과 상관없다는 뜻을 보이는 엘란카넌, 레랴나스, 카랴만을 불러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뭐, 나중에 치우는 것은 그들에게 떠넘기면 되니. 여태 이름을 지을 때 이 정도로 난장판이 된 적은 없었다. 보통은 그 아이가 속한 일족의 말을 존중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자기 일족에서 지은 이름을 가지게 하려고 저 난리가 난 것이다.
  특히 레드, 블랙, 실버 일족의 마찰이 심했다.
  실버 일족은 마치 이번에 태어난 아이가 자신들의 일족인 것 마냥 이야기 하는 레드,     블랙 일족이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레드, 블랙 일족은 전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난장판도 아닌 곳에 신경을 끊은 이들은 세상이 평화로운 듯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난장판인지라 그들은 누군가 아장아장 걸어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 나도 차 줘요."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래쪽을 내려다 본 레랴나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 차 마시고 싶니? 잠깐만 기다려."
  "아저씨, 이 차 이름 뭐에요?"
  유현은 드래곤 로드를 아저씨라 칭하며 차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드래곤 로드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건 '나라인'이라는 차란다."
  로드도 멍한 눈으로 유현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좋은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유현은 참 귀여웠다. 카랴만과 엘란카넌도 그런 유현을 흐뭇한 듯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시선으로 보지?'
  그때 카랴만이 놀랍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유현을 안으며 말했다.
  "맙소사! 이렇게 멀리까지 혼자 힘으로 걸어온 거니? 저 난장판을 뚫고?"
  놀랍다는 듯한 카랴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이었다.
  아니, 사실 저 난장판을 뚫고 온 것이 아니라 '피해' 온 거지만 말이다. 그러자 로드가 화가 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쳤다.
  "애가 싸움 한복판을 지나왔는데 아직도 싸우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로드의 목소리에 모두들 침묵했다.
  '어어, 분명 피해 왔다니까요?'
  로드의 말을 속으로 정정하는 유현이었다. 아무튼 모두는 놀란 눈으로 카랴만에게 안겨 있는 유현을 쳐다보았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해츨링이다.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한 이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해서 마구 쏴대던 마법에 혹여 저애가 맞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그때 유현을 데려다 놓았던 방에서 골드 일족의 설룡인 크리스란이 뛰어왔다.
  "어? 너 언제 거기까지 갔어?"
  바로 조금 전, 유현의 독설 때문에 정신적 공황에 빠져든 어린 드래곤들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던 유현이 자는 듯하자 깨우지 않고 조용히 놀기 시작했다.
  유현과 더 놀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유현을 깨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독설도 그 정도면 네거티브급 촌철살인, 살상용이다.
  그렇게 모두들 유현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고 있었는데 유현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당황하고 있을 때 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밖으로 나와 본 크리스란이었다.
  크리스란은 자신의 아버지 품에 안긴 유현을 보고 당황해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유현을 카랴만에게서 받아 안으려고 할 때였다.
  "그래! 이름을 애한테 정하라고 하면 되겠군요!"
  에랴나니스는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애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금세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런 에랴나니스의 제안에 모두들 그 방법이 괜찮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괜찮은 제안 같군."
  모두 찬성하자 에랴나니스가 카랴만에게서 유현을 받으며 말했다.
  "아가야, 넌 '레닌'이라는 이름이 좋니, 아님 카리아네니, 다카나하, 레디아느, 케이나크, 아라나칸, 에랴난이 좋니? 물론 이 엄마가 정해준 '레닌'이란 이름이 좋겠지? 뒤의 멍청한 이름들은 그냥 생각하지 않아도 된단다."
  에랴나니스의 성격이 어떤지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에랴나니스의 말에 카랴만은 질린 눈으로 에랴나니스를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가야, 그냥 '레닌'이라는 이름을 선택하렴. 그게 네가 편히 살 길인 것 같구나.'
  아무튼 그런 생각은 주위의 말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실버 일족의 아이야! '카리아네니'로 해라. 네 어미의 말은 무시해!"
  "같은 일족에서 만들어준 '레디아느'라는 이름으로 하렴."
  "아, 그냥 '케니아크'로 해버려!"
  "다카나하!"
  "아라나칸!"
  "'에랴난'으로 하렴!"
  한마디씩 더한 말로 인해 조용했던 로드의 레어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그 소동의 당사자인 유현은 정작 이곳의 이름에 대해 잘 몰라 그저 귀를 울리는 그 목소리들에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어머니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듯한데 그것도 곤란했다. 주변 어른 드래곤들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진짜! 애한테 왜 강요해요?"
  "강요를 시작한건 너잖아!"
  그렇게 서로를 향해 또다시 소리를 높이는 드래곤들이었다. 그때 유현이 말했다.
  "다 싫어요."
  순간 그 한마디에 정적이 흘렀다.
  그런 유현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곧 에랴나니스가 소리쳤다.
  "캭! 당신들이 강요하니깐 이렇게 되잖아!"
  "웃기지마! 네가 강요한 것도 있잖아!"
  다시 난장판 시작. 유현은 그런 그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유현이 이곳까지 나온 이유는 그의 귀에 울려 퍼지는 굉음 때문이었다. 뭔가가 왕창 박살나는 소리에 질린 유현이 기척을 죽이며 방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화려한 마법이 여기저기서 난사되고 있었다.
  유현이 한 발 물러서서 그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쁜 마법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가 어떤 금발의 미남자와 같이 차를 마시는 것이 보였다.
  유현은 그것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그들이 차를 마시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이 세계의 차를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위험해 보이는 마법들을 피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싸우는 이유가 자신의 이름 때문인 것 같았다. 레어 안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을 보고 드래곤 로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앞에서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드래곤 로드는 다시 한 번 우렁찬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말했다.
  "그렇게 싸울 거면 다 내쫓아버릴 것이야."
  로드의 한마디에 레어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한숨을 푹 쉰 드래곤 로드는 이 싸움의 원인이자 불쌍한 피해자(?)인 유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 아이의 이름은 레랴나스, 엘란카넌, 카랴만 이 셋이서 정하기로 하지. 어차피 이들은 이름 짓는 것에 끼어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물론 최종 선택은 이 아이가 할 것이다."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반발한다.
  "저는 왜 빼요?"
  "자네는 이름 짓는데 합세했으니깐!"
  아무튼 멀뚱멀뚱 그 관경을 지켜보는 유현과 어느새 나왔는지 흥미롭게 이것을 구경하는 해츨링들이었다.
  유현은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저들이 지어준 이름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 될 것이다. 유현이라는 이름은 이제 버려야 하는 건가?
  아무튼 그렇게 유현이 고민하고 있을 때 셋은 나름 고민하며 머리를 맞대로 이것저것 토론하기 시작했다.
  "움, '에린'은요?"
  "흔해."
  "음, 장인어른과 장모님, 제 이름의 앞 글자를 따 '엘레카'는 어때요?"
  "너무 뻔하지 않은가?"
  엘레카를 주장하려던 카랴만은 다음 공격에 저지되었다.
  "왜 내 이름은 빼는 거야!"
  붕!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에랴나니스가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엘레카에."
  "그것도 뻔해."
  이것저것 토론하고 있을 때 레랴나스가 말했다.
  "그럼... '에이라나' 어때요?"
  그 말에 둘의 눈이 반짝였다.
  "그거 좋을 것 같은데요?"
  카랴만의 말에 엘란카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좋을 것 같소."
  그리고 정했는지 유현에게 물었다.
  "아이야, '에이라나'는 어떠니?"
  "네? '에이라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현. 에이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억양이 마음에 들었다.
  "에이라나."
  유현은 계속 에이라나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걸로 할래요."
  아마 이 세계에 조금만 익숙했더라면 죽어도 택하지 않았을 이름을 선택해버린 유현이었다. 그러자 레랴나스가 로드를 보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이제부터 '에이라나 로드'에요. 괜찮죠?"
  그러자 로드가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이름은 '에이라나'. 어엿한 실버 일족의 아이입니다."
  그렇게 유현은 '에이라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유현이라는 이름은 이제부터 깊숙한 곳에 묻힐 것이다.
  에이라나는 자신의 이름을 곱씹으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에이라나... 이제 진정한 이 대륙의 존재가 된 것이다.
   *   *   *
  에이라나는 손에 들린 책을 읽으며 하품을 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엄청 대단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에이라나였다.
  드래곤... 지상 최강의 종족. 인간 따위는 드래곤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간단하게 브레스만 뿜어도 도시 하나는 그대로 박살난다고 한다.
  그리고 만 년이라는 세월을 사는 고등 생명체. 중원으로 따지면 용! 그것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러니 한순간 드래곤을 미물 취급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지는 에이라나였다.
  유현은 에이라나는 이름을 받은 다음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레어 안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후 에이라나는 넓은 레어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에랴나니스의 서재에 들어가게 되었다.
  에이라나는 엄청난 수의 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어마어마했다. 마교의 서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튼 그렇게 심심함을 때우기 위해 에이라나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버렸다.
  자신의 엄마인 에랴나니스를 졸라 지식 전의 마법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에이라나는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 서재를 채운 책의 반도 못 읽은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드래곤에 관련된 책이란 책은 모조리 본 상태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하지 않는가? 물론 자기 자신이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에 대해 잘 알아둬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에이라나는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대해 감탄하게 되었고, 드래곤으로 환생한 자신이 엄청난 행운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음화화화화! 역시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래!"
  물론 이는 신빙성도, 근거도 없는 자신감이다. 아무튼 드래곤에 대한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은 에이라나는 이제 완벽하게 드래곤에 대해 자각한 상태였다.
  밥 먹을 때와 운동할 때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서재에서 보내는 에이라나를 보며 보며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짓기로 한 에랴나니스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에이라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런 에이라나를 대견스럽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이 세상에 대해 지식을 쌓아가면서 에이라나는 자신의 이름이 주는 느낌에 대해 알게 되었다.
  "쳇! 왜 여자애 같은 이름을 지어줬지?"
  에이라나. 어감으로 보면 분명히 '여자'의 이름이었다. 전생에도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오명을 자주 받았던 에이라나에게는 절대 마음에 안 드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인상을 쓰며 투덜거리던 에이라나는 다시금 책에 집중했다. 그런 것에 신경 써서 뭐하랴, 이미 정해진 이름인 것을. 아무튼 에이라나는 그렇게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을 읽던 에이라나는 어느 순간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번에 봤던 책에서 분명 드래곤은 날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등에 달린 날개는 결코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에이라나였다.
  "엄마! 나, 나는 거 연습할 거야!"
  그 길로 에이라나는 자신의 엄마인 에랴나니스에게 달려가 말했다.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에이라나~ 벌써 나는 연습을 하게?"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랴나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활짝 웃었다.
  "그렇담 이 엄마가 빨리 날갯짓 하는 법 가르쳐줄까?"
  빨리 날갯짓 하는 법?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맏은 에이라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초보 드래곤.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도 빨리 날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그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 결과 바보 같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에이라나였다. 그리고 그에 묘하게 웃는 에랴나니스.
  몇 시간 후 에이라나는 처절하게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게 되었다.
  "끼야아아악!"
  처절한 추락과 동시에 에이라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날개를 파닥거렸다. 하지만 몸은 속절없이 추락할 뿐이었다.
  멈칫!
  그리고 간신히, 드디어 지상과의 거리를 1미터 남기고 에이라나가 멈췄다. 에이라나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생긋 웃고 있는 자신의 엄마에게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빨리 안 날아도 되니깐."
  하지만 에랴나니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 말을 거절했다.
  "어머~ 우리 귀여운 에이라나가 날아오르는 그날까지 이 엄마는 멈추지 않을 거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에이라나를 들어 올려 높이, 저 하늘 높이 던져 올려버리는 에랴나니스였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에이라나는 다시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결국 에이라나는 너무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훌쩍! 훌쩍!"
  에이라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훌쩍이고 있었다.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저런 망나니 같은 어미를 만나 이 무슨 고생이니?"
  레랴나스가 자신의 품에서 훌쩍이는 에이라나를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바로 반발하는 에랴나니스.
  "뭐라구요? 전 그저 사랑하는 따... 악!"
  퍽!
  "헛소리 말고 손이나 들어!"
  에랴나니스의 반발은 엘란카넌에 의해 저지되었다. 엘란카넌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몽둥이로 에랴나니스의 머리통을 후려쳐버린 것이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에랴나니스의 머리에 혹이 하나 커다랗게 생겼다.
  "이제 무슨 짓이에요!"
  그러자 엘란카넌이 말했다.
  "지금 네 아이를 공중에서 떨어뜨렸다가 올렸다가 떨어뜨렸다가 올렸다가를 반복하던 네놈의 할 말이 그거냐?"
  "그건 에이라나를 빨리 날게 해주려는 저의 사랑이었다구요!"
  그 말에 엘란카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고 레랴나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여보! 그년,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주세요."
  "알았소."
  "꺄아아악!"
  퍽퍽퍽퍽!
  우당탕!
  쾅쾅!
  꽈가가가가가강!
  엄청난 폭격 소리와 고래고래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 그것을 무시하며 공격 마법과 난투극을 벌이는 할아버지...
  이 황당한 광경에, 에이라나는 우는 것도 멈추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일의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사건은 오랜만에 에이라나를 보러온 엘란카넌과 레랴나스가 에랴나니스의 레어를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레어에 워프로 도착한 순간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딸이 어린애를 데리고 어디를 갔나 싶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밖에서 들리는 처절한 비명소리와 웃음소리.
  그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비명소리가 에이라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당장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보았다.
  화사하게 웃으며 마법을 이용해 에이라나를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가 순간 마법을 풀어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에랴나니스와 울면서 소리치는 에이라나를.
  그 모습에 레랴나스는 얼굴에 힘줄 하나를 만들고 당장 지옥의 업화라는 헬 파이어를 자신의 딸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 기운에 깜짝 놀라 피하는 에랴나니스 대신 에이라나를 자신의 품에 워프시켰다.
  곧이어 엘란카넌이 딸과 닮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며 지옥의 얼음 꽃 프리나징스를 에랴나니스에게 던지고 그녀를 붙잡아 지금껏 구타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덕에 에이라나는 우는 것도 잊고 멍한 표정으로 싸우고 있는 부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에랴나니스는 부모에게 죽도록 얻어터졌다. 그리고 다시는 에이라나를 데리고 그런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그로부터 반년 후, 에이라나는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되었다.
  아무튼 에이라나의 성장에는 이를 비롯해 이것저것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았다. 그렇게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   *   *
  에이라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굳었다. 그리고 잠시후 경악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그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100년이 흘러 에이라나는 폴리모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폴리모프는 8서클의 고위 마법이었다. 100살이 된 해츨링은 8서클은 고사하고 7서클, 6서클 마법은 물론, 그나마 5서클도 아닌 4서클의 마법을 겨우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폴리모프는 드래곤의 특권이었다. 아무리 어려도 마나를 느낄 때쯤이면 기본적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한 것이다.
  에이라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마나를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 모습을 떠올렸다. 허리까지 찰랑이던 흑발,그리고 여자보다 아름답던 자신의 외모.
  처음 시도한 폴리모프로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이 나올지 몰랐는지 에랴나니스는 멍한 표정으로 천족이 강림한 것 같은 에이라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에이라나는 100년 만에 보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은발에 은안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똑같았다. 외모며 키, 그리고 봉긋 솟아 있는 가슴하며.
 ...가슴? 지금, 가슴이라고 했나?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에이라나가 자신의 몸을 보았다. 그리고 굳었다. 아직 폴리모프가 미숙해서 그런지 알몸인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옷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뚱이가 중요했다. 분명 그는 자신은 남자를 생각하고 폴리모프 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여자가 되어 있지?"
  굳으며 말하는 에이라나의 입에서 드디어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발, 뭐가 잘못된 거냐고!"
  그렇게 에이라나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당장에 엄마에게 달려가 이상하다고 하는 에이라나의 말에 에랴나니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응? 왜 여자가 되어 있냐니, 당연한 거 아니니?"
  에랴나니스의 말에 에이라나가 물었다.
  "뭐가 당연해요? 당연히 남자가 되어야지!"
  빽 소리치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던 에랴나니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 인간 남자의 몸으로 폴리모프를 시도했구나?"
  끄덕. 에랴나니스는 그런 자신의 아이를 보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그건 힘들 걸?"
  "왜요?"
  에이라나는 뭔가 느껴지는 한기에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지? 이 한기는?'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에랴나니스는 그런 네가 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원래 드래곤은 성별을 바꿔 폴리모프 하려면 적어도 1,500살은 넘겨야 한단다."
  "에?"
  에랴나니스의 말에 에이라나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런 자신의 아이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깐, 여자애인 네가 남자 폴리모프를 하려면 앞으로 1,400년은 더 있어야 하지."
  쩌적! 그 말에 에이라나가 굳었다. 방금 머리로 이해 못할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여... 자요?"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멍하니 되묻는 에이라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에랴나니스였다.
  "응. 그런데 왜 그러니? 딸?"
  아, 눈앞이 노래지는구나. 머릿속이 하얗게 뜨는 것을 느끼는 에이라나였다.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왜 '에이라나'인지. 그리고 저번에 그 빌어먹을 레드 일족의 성룡 자식이 왜 자신을 찜했다고 한 것인지.
  갑작스레 몰려온 공황에 에이라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에랴나니스는 그런 에이라나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에이라나는 이미 기절한 후였다.
   *   *   *
  에이라나가 폴리모프된 상태에서 누워 있는 곳은 바로 레어의 어느 방 침대 위였다.      에이라나는 눈을 떴다. 그러고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뭔가 엄청난 정신적 공황에 빠져 기절한 것 같은데 그게 뭐 때문이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에이라나는 나신인 상태로 솟아 있는 자신의 가슴을 보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맞아. 나 여자였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남자라고 자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크흑! 분명 남자 아니었어?"
  그렇게 절규하고 있을 때 에랴나니스가 들어온다.
  "어머~ 일어났구나?"
  에랴나니스는 생긋 웃으며 자신의 딸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기절해서 얼마나 놀랐다구."
  갑자기 기절하는 딸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에이라나가 기절한 이유를 알 리 없는 에랴나니스가 물었다.
  "그런데 무엇이 널 그렇게 충격 받게 만들었니?"
  에이라나가 에랴나니스를 보며 말했다.
  "엄마."
  에이라나의 부름에 에랴나니스가 반응했다.
  "응?"
  그런 자신의 엄마를 보며 에이라나가 묻는다.
  "저 남자 아니었어요?"
  침묵. 아니 정적이었다. 에랴나니스는 지금 자신의 딸이 뭐라고 했는지를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 뜻을 이해하고는 경악한 눈으로 자신의 딸을 쳐다보는 에랴나니스.
  그리고 잠시 후.
  "풋!"
  바람 빠지는 소리가 에랴나니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에랴나니스가 배를 잡고 엎어져 웃어대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 엄마, 나 죽어요!"
  배를 잡고 방 이곳저곳을 구르고 다니는 엄마를 보며 에이라나가 절망했다. 절망하고 절망했다. 저 반응을 보니 자신은 이제 여자인 것이 확실했다. 그 사이에도 에랴나니스의 웃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히끅! 히끅! 아하하하하하! 진짜 웃긴다! 너 진짜, 히끅! 100년을 남자로 자각하고 살아온 거니?"
  에랴나니스의 말에 절망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
  "꺄하하하하하하하! 진짜 웃겨! 아, 나 죽어."
  배를 잡고 방 이곳저곳을 대굴대굴 구르는 에랴나니스 였다.
   *   *   *
  에이라나. 인간 하유현이 환생한 드래곤.
  이제 인간이 아니며 드래곤인 에이라나라 불리는 100살 먹은 어리디 어린 해츨링. 성별은 여자. 하지만 100년 동안 전생의 성별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온 그, 아니 그녀였다. 그런데 이제는 남자가 아닌 여자란다. 그것 때문에 격하게 충격을 먹은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오랜만에 놀러온 자신의 할머니와 같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빠는 지난 100년 동안 이름을 지을 때 말고는 보지도 못했다.
  자신의 엄마인 에랴나니스가 레어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엄마인 에랴나니스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요~ 엄마, 얘는 자신이 100년 동안 남자인 줄 알았대요."
  에랴나니스는 아직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레랴니스에게 그 재밌고도 재미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레랴니스도 그 소리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으니 에이라나의 100년 동안의 착각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성별도 알지 못하다니.
  레랴니스가 자신의 손녀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폴리모프 한 것 같았다.   폴리모프 전 상태도 아주 아름다웠는데 인간의 모습도 상당히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녀였다.
  에이라나는 나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엄마는 가끔 자신을 딸, 혹은 손녀라고 칭한 것도 같았다. 물론 에이라나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하.지.만 그보다 더욱 그녀를 침묵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엄마가 입힌 옷 때문이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은빛 드레스. 에이라나에게 무척 잘 어울렸지만 그것은 더욱 에이라나를 절규하게 만들었다. 지금 에이라나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아름다웠다. 아마 남자가 봤다면 침을 질질 흘릴 만큼.
  그렇다고 해도 에이라나는 이렇게 말해줄 자신(?)이 있었다.
  '야 이 씨발 새꺄! 어디서 침 흘리고 지랄이야? 죽고 싶어? 앙? 확 죽여 버릴까 보다! 이 개XXXX같은 놈!'
  성격 절대 안 좋은 에이라나였다.
  아무튼 에이라나는 침묵하며 차를 마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보였는지 에랴나니스는 다시 광분하며 웃기 시작했다. 할머니인 레랴니스까지 웃음을 참는 듯한 모습은 에이라나를 더욱 절망으로 빠트리기 충분했다.
  에이라나가 폴리모프한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말은 드래곤들에게 쫙 퍼진 상태였다. 해츨링이었을 때에도 눈에 띄게 아름다워 드래곤들을 홀렸던 에이라나. 그녀가 폴리모프한 모습은 모두가 호기심이 동해 찾아오기에 충분했다.
  드래스를 입으며 묵묵히 충격에 휩싸이고 있는 에이라나의 모습은 뭇 남성 드래곤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아직 사태(에이라나가 자신을 100년 동안 남자로 착각했다는)를 아는 것은 에랴나니스, 레랴니스, 엘란카넌이 전부였기에 많은 남성 드래곤들이 아직 어리디어린 에이라나에게 벌써부터 청혼을 한답시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 폴리모프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드래곤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그전부터 에이라나를 노리고 있던 드래곤들은 많았다. 아무튼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여 오는 그들에게 절대 참아줄 에이라나가 아니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부들부들 어깨를 떨기 시작한 에이라나는 잠시 후 당연히 폭발했다.
  "썅! 지금 염장 지르냐! 이 작자들이 죽을라고! 크아아악 - 다 덤벼!"
  그리고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레랴니스가 그런 에이라나를 말렸고 에랴나니스와 엘란카넌은 헛소리를 지껄여오는 남성 드래곤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닥치고 꺼져, 이것들아!"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부녀(에랴나니스와 엘란카넌)의 모습인가? 그래도 몰려드는 남성 드래곤들을 향해 폭발한 에랴나니스와 엘란카넌이 브레스를 날려버렸다. 그래도 정신 못 차리는 것들은 수두룩하게 널렸다.
  결국 그 소식을 들은 카랴만이 찾아와 깽판을 치는 바람에 모두들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카랴만은 분명 에랴나니스와 레랴니스, 엘란카넌에게는 약하다. 하지만 그 셋을 제외하고는 드래곤 일족 중 가장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것이 바로 에이라나의 아빠였던 것이다.
  이런 저런 소동을 겪으면서 에이라나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1,400년 후에 남자로 폴리모프하고 다니면 되지!'
  그, 아니 그녀의 이 결심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에이라나에게 있어 새로 생긴 마법이란 능력은 여자가 되어서 싫어졌던 드래곤의 육체에 더욱 애착이 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   *   *
  레어 앞 공터로 나온 에이라나. 에랴나니스는 그런 에이라나에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에이라나, 정신을 집중하고 발현하고 싶은 마법을 생각하고 마법 이름을 말하면 마법이 실현된단다."
  "응. 알았어, 엄마."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에이라나의 모습.
  그런 에이라나의 모습에 에랴나니스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손에 들린 에이라나의 검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라나는 어느새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 보였다.
  그 점이 의아했지만 에랴나니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하품 한 번 해주고 들어갈 뿐. 그런 에랴나니스를 힐끔 쳐다본 에이라나는 검에 마법을 걸었다.
  "아이스 블레이드!"
  그러자 실버 일족의 빙속성 마법답게 검에 차가운 한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일단은 기본적인 베기와 찌르기였다.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것과 폴리모프했지만 드래곤의 육체인 그것에 조화되어 너무도 깔끔한 모습이었다. 보통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랄까?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젠장! 역시 몸이 약하군.'
  에이라나는 과거 마교의 소교주. 그런 그녀로서는 약한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라나는 일단 검을 뒤로 치웠다. 드래곤은 마법의 종족, 시간도 차고 넘친다.
  에이라나는 일단 자신의 마나를 체크했다. 대충 4서클 급의 마나. 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나중에 심법으로 마나량을 늘리든지 해아지.'
  일단 고룡이 되면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가지게 되지만 그 이전 까지는 마나를 많이 쓰면 고갈된다. 고룡 이전까지는 아직 많이 미숙하기 때문이었다.
  고룡이 퍼도 퍼도 물이 마르지 않는 바다라면 성룡은 작은 샘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인간보다 훨씬 많겠지만. 그리고 윔급의 드래곤들은 그 중간인 강 같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마나량을 확인한 에이라나는 성격이 화통한 탓에 결국 마법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파이어 볼! 아이스 볼! 워터 볼! 썬더 볼! 어스 볼!"
  쾅! 콰가가가가강! 쾅! 쾅! 쾅!
  진짜 화통하다 못해 무식하고 개념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에이라나는 마법을 남발하며 에랴나니스의 앞마당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나 아직 100살 밖에 되지 않은 꼬마였다. 그런 애가 마법을 써봤자 얼마나 쓰겠는가? 결국 에이라나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동안 에랴나니스는 느긋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자신의 아이가 마법을 쓰는 소리에 피식 웃으면서. 그러나 잠시 후 에랴나니스의 표정이 그 끝을 달리더니 다다다 레어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에이라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마나고갈에 의해 생긴   어지러움을 참고 있었다.
  퍽!
  "커억!"
  갑자기 뒤통수에 느껴지는 엄청난 충격에 에이라나는 휘청거렸다. 뒤이어 에랴나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화상아! 마법을 그렇게 미친 듯이 남발하면 어떻게해? 마나고갈로 죽고 싶어?"
  말이 씨가 된걸까. 에이라나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녀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아직은 해츨링이다. 그런 해츨링이 이렇게 마법을 남방하면 마나고갈로 죽을 수도 있었다. 이에 놀라 개념 없는 자신의 딸의 뒤통수를 갈겨준 에랴나니스였다. 한 발 늦긴 했지만.
   *   *   *
  에이라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번에 자신이 기절했을 때 누워 있던,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곳에 누워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프릴과 레이스가 달린 여성용 잠옷이었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만든 건지.'
  잠옷은 은빛 실크로 만들어진 속이 살짝 비치는 옷이엇다.
  한숨을 푹 쉬는 에이라나였다. 왠지 엄마가 인형놀이 대신 자신에게 옷을 입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에이라나는 남자였던 자신이 이렇게 변한 것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흑흑...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누."
  전에는 얼굴은 계집이라도 몸과 마음은 남자였는데 이제는 마음만 남자이니.
  "내, 1,400년 후에 꼭 남자로 폴리모프한다!"
  그렇게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하며 에이라나는 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쉰 에이라나는 블라우스와 편한 면바지를 꺼냈다.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프릴, 레이스가 달린 잠옷을 벗어버렸다. 팬티에까지 레이스가 달린 것은 너무했다.
  '속옷은 언제 갈아입혔을까?'
  갑자기 골이 아파왔다. 에이라나는 잠옷을 침대에 던져 놓고 블라우스와 면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검을 집었다. 투박한 검. 자신이 직접 할아버지의 레어에서 가져온 검이었다. 잠시 검을 살피던 에이라나는 기지개를 켜고 방문을 열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 안녕?"
  문 앞에서 적발에 적안을 가진 한 청년이 그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청년을 보는 에이라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짜증의 연속인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카라나스. 레드 일족의 성룡.
  그는 폴리모프를 했다는 에이라나를 보러온 참이었다. 매우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녀의 폴리모프 모습이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찜한 여자에게 찝쩍거리는 일족의 어른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 차이가 얼만데.'
  뭐, 그렇다고 에이라나도 그를 절대 조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찾아온 레어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해하다가 가디언에게 에랴나니스가 외출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왕 온 것, 얼굴이나 보고 가자는 생각에 에이라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쪽을 향했다.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일족 특유의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카라나스가 도착한 것은 그녀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이었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에이라나였다. 카라나스는 폴리모프한 모습으로는 처음 보는 에이라나의 아름다운 외모에 눈을 크게 떴다. 일족들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각 이상이었다.
  꾸욱!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아, 이러면 나도 조금 힘든데.'
  에이라나를 더욱 가지고 싶어진 카라나스였다.
  "뭐야?"
  에이라나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말했다. 이 느끼하고 재수 없는 녀석이 레어에 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왜 왔냐?"
  그가 왔다는 것 자체가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이라나. 그녀의 얼굴은 다시는 상종하기 싫었는데 얼굴을 보게 되어 불쾌하다는 뜻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카라나스는 그저 능글 맞게 웃을 뿐이었다.
  "이런~ 낭군님께서 오셨는데 반응이 왜 그러시나?"
  그러자 얼굴이 팍 구겨지는 에이라나.
  "씨발, 벌써 노망났냐? 아님 치매냐? 정신지체?"
  이곳에도 정신지체가 있나보다. 에이라나의 걸쭉한 말투에도 카라나스는 킥킥대며 웃을 뿐이었다.
  "뭘 그리 실실 쪼개냐? 미쳣냐?"
  뭘 그리 웃는지. 에이라나가 의아해하며 묻자 카라나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언제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말투라서."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럼 적응하지마. 그리고 보지도 말자."
  카라나스를 피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스윽!
  "어허! 낭군님께 방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나?"
  카라나스의 뻔뻔한 태도에 에이라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이게 죽을... 어어! 야!"
  하지만 에이라나의 손목을 잡은 카라나스는 그저 능글맞게 웃으며 방안으로 에이라나를 데려갔다. 어이없게 다시 방으로 들어오게 된 에이라나. 카라나스는 스윽 에이라나의 방을 둘러 보았다.
  잘 꾸며진 방. 방금 일어났는지 침대의 이불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침대 위에는 잠옷이 팽개쳐져 있었다. 그것을 슬쩍 들어본 카라나스는 속이 비친다는 것을 알고는 히죽거리며 에이라나를 놀려댔다.
  "호~ 이런 잠옷을 입나보네? 속이 다 비치잖아?"
  그러자 에이라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씨발! 지금 장난까냐? 남의 잠옷 가지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건 엄마가 강제로 입힌 거라고!"
  버럭 소리치는 에이라나를 보며 귀를 막은 카라나스는 잠시 에이라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성격은 레드 일족보다 더 불 같은 것 같군."
  그러자 에이라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매력이야."
  그러자 잠시 에이라나를 쳐다보던 카라나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매력이군."
  그러자 에이라나가 짜증내며 말했다.
  "느끼한 면상 치워라."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 카라나스의 눈에 에이라나의 투박한 검이 들어왔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 거리던 카라나스가 물었다.
  "음... 검은 왜 차고 있지?"
  그러자 힐끔 자신의 검을 쳐다본 에이라나가 말했다.
  "바보냐? 당연히 검술 수련 하려고 한다, 왜?"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카라나스. 그러고는 웃기 시작했다.
  "쿡!"
  "잉?"
  에이라나는 갑자기 웃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푸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카라나스가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이라나의 표정이 점점 떨떠름해지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그러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카라나스가 말했다.
  "검술 따위는 배워서 뭐하게?"
  '검술 따위?!'
  카라나스의 말에 에이라나의 기분이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저 도마뱀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심상치 않은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카라나스가 계속 입을 열었다.
  "쿡! 인간 따위가 만든 것이 뭐가 필요하겠어? 그냥 성룡만 되면 자연적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데."
  카라나스의 말에 기분이 최하점으로 치닫는 에이라나였다.
  "뭐, 네가 호기심이 있다면, 어때? 내가 가르쳐 주... 헉!"
  쐐애애애액!
  "어디 그 검술 '따위'에 죽어봐라!"
  에이라나는 드래곤이기 이전에 인간 하유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유현은 무인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삶과 연을 끊었다 해도 뼛속까지 무인의 긍지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에이라나에게 카라나스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투박한 검답지 않게 무시무시한 예기를 품은 에이라나의 검.
  그 예기에 잘못 베었다가는 큰일 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카라나스였다.
  '무엇이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지?'
  보아하니 뭔가 자존심 상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카라나스였다.
  그렇게 카라나스는 깊게 생각하며 에이라나의 검을 피해가고 있었다. 빠르고 집요한 검. 그래도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막 폴리모프를 한 주제에 이 정도의 검술을 펼치는 에이라나를 감탄의 눈길로 쳐다보는 카라나스였다.
  아무래도 폴리모프를 익힌 이후 검술을 독학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영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초식을 펼치고 있을 뿐이었다. 몸에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었다.
  카라나스가 여유롭게 검을 피하고 있을 때.
  "헉!"
  갑자기 카라나스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카라나스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에이라나의 검이 자신의 팔을 휘감아 오는 듯 하더니 얼굴을 노리는 게 아닌가?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토록 정교한 검술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천마환검!"
  에이라나가 천마신공 중 검법인 천마환검을 사용했다. 이는 여러 개의 환검으로 적을 공격하는 무공이었는데 환검 중에서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갑자기 늘어나는 환검을 보며 당황하는 카라나스. 결국 환검 하나가 카라나스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각!
  카라나스가 에이라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살며시 자신의 뺨을 훑었다. 뺨에서 베어나오는 붉은색 피. 카라나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리다고 얕잡아 봤으니 당한 것이었다.
  카라나스는 자신에게 살기를 내뿜는 에이라나를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거지?'
  분명 자존심이 상해서 저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카라나스는 자신에게 달려들 태세의 에이라나를 보고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자존심이 무척 강한 아가씨로군.'
  정말 대단한 자존심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이지."
  카라나스가 살며시 웃었다. 에이라나는 더 이상 참기 힘들것 같았다.
  "개소리!"
  에이라나가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카라나스가 눈을 번뜩였다. 그것에 그 자리에서 굳은 에이라나의 머릿속에서 적신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저, 저 자식.'
  지금 카라나스의 눈빛은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에이라나는 긴장하며 살며시 검을 느슨하게 잡았다. 도망가지 않으면 위험할 듯 했다.   그렇게 도망갈 기회를 찾고 있는데.
  탁!
  카라나스가 엄청난 속도로 에이라나 앞으로 달려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쳤다. 그리고 떨어지는 검. 에이라나는 얼른 검을 잡으려 했지만 카라나스는 검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침착하게 자신을 향해 쌍장을 내질러 오는 에이라나를 보며 혀를 찼다. 대단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턱!턱!
  카라나스가 에이라나의 양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에이라나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털썩!
  자연스레 침대 위에 눕게 된 에이라나였다. 그 위에서 에이라나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카라나스.
  자세가 참 묘했다.
  에이라나는 인상을 팍 구기며 자신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 카라나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카라나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한 거야?"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카라나스. 그런 카라나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이 새끼야, 당장 안 비켜?!"
  에이라나가 소리쳤지만 카라나스는 묵묵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에이라나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면서도 손목을 놔주지 않는 카라나스.
  열이 받은 에이라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고 할 때 갑자기 카라나스의 얼굴이 다가오더니 에이라나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나 에이라나는 굳어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예상도 하지 못했기에 크게 당황한 에이라나였다.
  그러다 곧 카라나스가 자신에게 마법을 건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몸에 아무 힘도 없었다. 입도 열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런 마법이 다 있단 말인가? 그렇게 에이라나가 크게 당황하고 있는 사이 카라나스의 혀가 에이라나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에이라나의 입 안을 훑기 시작했다.
  당연히 에이라나의 표정은 점점 구겨져가고 있었다. 첫 키스인데, 전생에도 없었던. 게다가 몸은 여자지만 혼은 아직 남자다. 하지만 카라나스는 그런 에이라나의 굳은 표정을 힐끝 쳐다보더니 상관없다는 듯 계속 에이라나의 입술을 탐했다.
  결국 에이라나는 분노한 표정으로 얼굴을 거칠게 돌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무튼 자신의 입술과 카라나스의 입술을 떨어뜨리는데 성공한 에이라나였다. 그녀의 몸은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을 본 카라나스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그녀의 분노가 더욱 불타올랐다.
  에이라나도 말할 힘 정도는 있었다.
  "이, 변태 도마뱀! 죽고 싶어? 여긴 우리 집이거든? 너, 걸리면 죽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에이라나를 보며 카라나스는 그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그러자 당황하는 에이라나. 뭐가 저렇게 태연하단 말인가?
  하지만 다음에 들리는 카라나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졌다.
  "지금 내 눈이 뒤집어졌단 말이야. 널 가지지 않으면 안 될것 같았다. 에랴나니스 님께는 죽도록 맞겠지만 너에게 네 남편이 누군지 각인시킬 수 있다면야... 싼 편이지. 그리고 너의 첫경험도 내가 가져가고."
  "이런 미친!"
  에이라나는 속으로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 밖으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욕들을 동원해 카라나스를 씹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라나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드래곤의 소유욕.
  드래곤은 지독한 개인주의에 빠져 지내기 때문에 다른 존재에게, 특히 같은 종족에게 소유욕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드물 뿐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그 드문 경우가 현재 에이라나. 그녀는 유독 아름다운 외모로 소유욕의 대산이 되어 많은 드래곤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 카라나스 정도면 양호한 편? 잘하면 에이라나를 납치하는 사태까지 일어날지도 몰랐다.
  "야, 미친 빨갱이야!"
  에이라나는 카라나스를 씹고 또 씹었다. 하지만 카라나스는 그저 얼굴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무시하고 싶어도 계속되는 독설들을 감당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잠시 후 카라나스의 손가락이 에이라나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모두 풀어헤쳤다.    그러자 드러나는 에이라나의 몸매. 그런데 그것을 본 카라나스가 생뚱맞게 중얼거렸다.
  "절벽이네?"
  물론 에이라나의 가슴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런 카라나스를 죽일 듯 노려보는 에이라나.
  물론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이 자식 전부가 싫었다. 그렇게 이렇게 생각하는 에이라나의 눈에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카라나스조차도 움찔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내심 식은땀을 흘리는 카라나스. 이제는 '잘 그만둘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하게 된 그였다. 확실히 여기서 더 미움을 사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냥 잠깐 욱하는 마음에 이렇게 된 것이고, 에이라나를 놀려보고 싶기도 해서 이렇게까지 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쯤에서 비켜줄 생각이었다.
  한데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몸은 에이라나를 취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라나스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갈등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바로 디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와 번뜩이는 드래곤 피어, 그리고 자신의 목 언저리에 들이밀어진 마나와 마기가 뒤섞인 손. 손에는 핸드 블레이드가 시전되어 있었는데 그 날이 검은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마나와 마기가 뒤섞여 있는 것은 이 중간계에 단 하나, 블랙 드래곤뿐이었다.
  카라나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일족의 어른을 뵙습니다."
  그러자 섬뜩하게 퍼져나가는 드래곤 피어.
  "내 딸에게 무슨 짓이냐, 레드 일족의 카라나스!"
  흑발에 흑안을 가진 미남자. 블랙 일족의 윔급 드래곤이자 에이라나의 아버지인 카랴만이 흑안을 번뜩이며 카랴나스의 목을 딸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카라나스는 식은땀이 절로 흘렀고 에이라나는 자신을 노리지도 않는데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카랴만의 기운은 살벌 그 자체였다.
  카라나스는 잠시 에이라나를 아쉬운 듯 쳐다보다가 슬쩍 에이라나의 손목에서 손을 떼고 위에서 비켜 물러섰다. 그러자 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에이라나가 카라나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에이라나의 시선에 카라나스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카랴만은 에이라나를 살짝 안아준 다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얌전히 카랴만에게 안기는 에이라나.
  자신을 처음으로 안아주는 아버지의 손길이 사혈사의 태도와 닮아 있어 과거가 생각나 에이라나를 슬프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직 몇 번 본 적 없는 아버지에게 크게 의지하게 만들었다.
  그런 딸을 잠시 쳐다보던 카랴만이 살기를 뿜으며 말했다.
  "물었다, 레드 일족의 카라나스!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대충 짐작은 간다. 아니, 그 상황 보고 짐작 못하면 그게 바보니깐. 하지만 아직 100살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들(카라나스와 에이라나에게 청혼하는 드래곤들)에게는 정말 어이상실 그 자체였다. 물론 그게 다 딸이 잘나서이기는 하지만.
  '암! 누구 딸인데!'
  그 어미의 그 딸이라 했던가? 에랴나니스와 똑같은 사상을 가진 카랴만이었다. 하긴 에이라나가 누구를 닮았겠는가? 바로 지 부모들이지. 카라나스가 대답했다.
  "그냥 반은 장난이었습니다."
  그러자 더더욱 차갑게 변하는 카랴만의 눈빛.
  "그럼 반은 진심이었다는 뜻이군."
  카라나스는 부정하지 못했다. 만약 카랴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 에이라나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을 것이었다.
  카랴만의 차갑디 차가운 눈빛에 점점 주눅들어가는 카라나스였다. 그때! 그런 카라나스를 구해주는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쾅!
  "에이라나야, 엄마 왔다!"
  우렁차게 외치며 나타난 여인! 아름다운 외모에 강력한 기운을 풍기며 화사하게 웃는 그녀. 바로 에이라나의 엄마 에랴나니스였다.
  에랴나니스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에이라나의 방 앞에 워프하고 문을 박살낼 듯 발로 차며 들어왔던 것이다. 자신의 예쁜 딸이 아직도 자고 있으면 깨워줄 요량으로.
  그런데 안으로 들어온 뒤 방 안의 광경을 보며 에랴나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과 싸운 카랴만(그래서 에이라나를 본 적이 거의 없는 카랴만이었다. 지금은 방비를 어떻게 했냐고 속으로 씹고 있음)이 자신의 레어에 와 있고 레드 일족의 꼬맹이(카라나스는 에랴나니스까지 합세하자 자신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고 있음)는 또 왜 여기에 있을까?
  그녀는 순간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다가 레드 일족의 꼬맹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과 카랴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닫는데 걸린 시간이 2초. 그녀는 즉시 카랴만을 돌아보았다. 이것이 3초 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카랴만이 죽일 듯 카라나스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4초였다.
  그리고 '딸은 어디 있나?'하고 찾고 있을 때 에이라나가 카랴만의 품에 안겨 자신과 카랴만을 번갈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걸린 시간이 7초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에이라나는 3초간 생각에 잠겼다. 그때 카랴만이 입을 열었다.
  "에랴나니스, 너 레어 방비를 어떻게...."
  하.지.만!
  "이 변태 검둥이 도마뱀!"
  10초간 상황파악을 한 에랴나니스가 카랴만을 죽일 듯 노려 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카랴만은 물론 당연하게도 카라나스와 에이라나까지 당황했다.
  왜 카랴만에게 이랴나니스가 소리를 지르는 것인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세 드래곤이었다. 그때 그들의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우리 에이라나가 예쁘다지만!"
  에랴나니스가 씩씩거리며 다음 말을이었다.
  "아무리 드래곤들에게 근친상간의 개념이 없다지만!"
  이 말 다음에 카라나스와 에이라나는 조금씩 공황상태로 빠졌고 카랴만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리고 다음에 드린 에이라나의 말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100살밖에 되지도 않은 자신의 딸을 품을 생각을 해! 이 변태! 저질! 말미잘!"
  할 말 없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것이었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카랴만이 에이라나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이봐, 무슨 착가...."
  하지만 카랴만이 설명하기도 전에 에랴나니스의 주먹이 카랴만의 얼굴에 꽂혔다.
  퍽!
  카랴만이 날아가 에이라나의 방 벽에 처박혔다.
  쾅!
  마나를 실은 듯 위력이 대단했다.
  "이 바람둥이 자식! 내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아봤어! 이 천하의 죽인 놈!"
  그리고 카랴만에게 달려들어 카랴만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정말 미스테리다. 에랴나니스는 이런 어이없는 상상을 어떻게 했는지... 도대체 저 드래곤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은 것일까?
  카랴만은 이런 에랴나니스가 뭐가 좋다고 결혼했을까?
  아무튼 엄마에게 죽어라 얻어터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에이라나였다.
   *   *   *
  "아하하하! 미, 미안, 카랴만."
  에랴나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카랴만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얼굴에 난 흉터를 하나하나 스스로 힐로 치료하며 말했다.
  "됐어. 이런 어이없는 오해로 얻어터진 게 한두 번인가?"
  그렇게 말하는 카랴만은 너무도 처량해 보였다. 어이없는 오해로 인해 에랴나니스에게 죽도록 구타당한 카랴만... 너무도 불쌍했다. 그리고 이번 일의 원흉인 카라나스는 회의에 의해서 징계를 당했다.
  하지만 카라나스는 주장했다. 징계보다 일족들의 구타가 더 아팠다고! 다 큰 어른들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밟고 갔다고 바로 로드에게 신고해버린 카라나스였다.
  당연히 그 원흉을 찾아 나선 드래곤 로드. 그리고 그 원흉들을 모두 찾아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그거요? 그 어리고 건방진 놈이 감히 제가 찜한 여자를 넘봤잖습니까? 당연히 손 봐줘야지요."
  그 말을 전해들은 에이라나는 그것들의 목을 따러간다고 난리를 피웠다. 물론 그런 에이라나보다 먼저 화해하여 의기투합한 에랴나니스와 카랴만이 그들의 레어를 쓸어버렸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큰 사건이 많았다.
  에이라나는 늘 마법을 시험한답시고 에랴나니스의 레어 앞을 초토화 시켜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무공까지 수련하기 시작했다. 에랴나니스도 늘 초토화 되는 자신의 레어 앞마당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이제는 '그러려니'하고 있었다.
  아무리 꾸중해도 계속 날려대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방어 마법을 걸기는 귀찮고.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가는 에이라나였다.
   *   *   *
  에이라나는 오랜만에 레어 전체를 돌아다닐 생각을 했다.
  너무도 거대한 레어인지라 쉽사리 둘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 경공술을 조금 사용할 수 있게 되니 레어 전체를 둘러볼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레어 전체를 돌아보았다.
  부억, 서재, 침실 등 여러 곳을 둘러본 에이라나였지만 정작 보물고와 무기고는 둘러보지 못했다. 그리고 서재를 보다가 드래곤은 엄청난 보물을 쌓아놓고 산다기에 궁금증이 동한 에이라나였다.
  이것저것 신기한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드디어 자신이 원하고 원하던 보물고가 나왔다. 에이라나는 바로 보물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감탄,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에, 꼭 마교 교주 비무장 세 배에 이르는 크기. 거짓말 안 하고 천장까지 보물로 꽉 차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자 머리가 멍해지는 에이라나였다.
  '드래곤 레어에 있는 자금은 제국 몇 십 년 분량의 국가 예산과 맞먹는다고 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이야!'
  에이라나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천천히 보물고에 다가가 보물 하나를 들어보았다. 금을 들고 이로 꽉 깨물어 보는 에이라나. 가짜가 아니었다.
  "우와~ 최고다!"
  바로 보석과 금괴를 구경하기 시작하는 에이라나였다.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던 에이라나는 마지막에 비싸 보이는 것만 몸에 걸치고 보물고 밖으로 나왔다.
  에이라나의 손에 들린 것 중에는 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던 값비싸 보이는 수정구 하나가 있었다.
  너무도 영롱하게 빛나며 아름다운 빛을 뿜는 구슬. 딱 보기엔 유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신기한 빛을 품고 있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는데...
  "우리 딸, 뭐해?"
  "히끅!"
  갑자기 뒤에서 호기심에 가득한 에랴나니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에랴나니스의 등장에 깜짝 놀란 에이라나는 실수로 구슬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챙그랑!
  순간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어? 깨졌다?"
  에이라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에랴나니스는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 방금 본 파편들은 분명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수정구슬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드워프가 만든 것인데 여러 가지 신비한 빛을 품기에 받아(사실 빼앗아 왔다고 보는 편이 맞다)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딸이 깨버렸다. 그래, 그것까지는 용서해줄 수 있다.
  에랴나니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그거 아끼는 거였는데."
  하지만 곧 그 웃음은 사라지고 눈이 뒤집혔다. 아니, 뒤집어 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라나가 걸치고 있는 것 중 자신이 안 아끼는 게 없었고 흠집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너무도 간단했다. 에이라나는 이것들을 들고 마법 연습을 하고 온 것이다. 그때 마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마법이 끝난 후의 파편들에 의해서 말이다.
  에랴나니스는 보물에 관해서는 째째한 드래곤이었다.
  "캭!"
  당연히 폭발하는 에랴나니스.
  "그것들이 어떤 건데!"
  퍽퍽퍽퍽!
  "우에에에에엥, 잘못했어요."
  에랴나니스는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몽둥이로 에이라나를 패기 시작했다. 이간인 상태에서는 크게 다치니 드래곤으로 폴리모프를 강제 해제 시켰다.
  아무리 100살이라지만 아직 작았다. 조금 힘들지만 사람이 안을 수 있을 정도쯤 된다고 할까? 드래곤의 본격적인 성장은 마나를 느낄 수 있는 100살부터 시작이었다.
  아무튼 에이라나는 뒤뚱거리며 피해 다녔고, 에랴나니스는 눈이 뒤집혀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에이라나를 쫓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에이라나를 보러온 레랴나스가 그 광경을 보고 에이라나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에이라나는 아마 반죽음 이었을 것이다.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족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과의 만남
  은발에 은안을 가진 한 소녀가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지르고 있다.
  싹뚝!
  그러자 눈앞의 오크 한 마리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소녀는 빠른 속도로 뒤돌아 자신의 뒤를 노리던 트롤의 미간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푹!
  너무도 깔끔한 동작! 트롤은 잠시 '끄르르르'하다가 쓰러졌다.
  쿵!
  소녀는 트롤의 머리를 박차며 높이 점프해 몬스터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당황하는 오크들과 고블린, 그리고 몇마리의 트롤들. 
  사뿐!
  "크워?"
  "안뇽?"
  퍽!
  소녀는 생긋 웃으며 발로 트롤의 머리를 차버렸다. 그러자 당연하 듯 터져버리는 트롤의 머리통. 소녀의 발에는 은빛 강기가 맺혀 있었다.머리를 잃은 트롤이 그대로 쓰러졌다.
  쿵!
  순식간에 두 마리의 트롤을 더 처리한 소녀!
  아무리 트롤의 생명력이 질기다 해도 미간이 뚫리고 머리가 박살난다면 절대 재생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는 오크와 트롤, 고블린의 시체들로 가득했다. 족히 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는 태연했다. 백 마리의 몬스터들을 베어 넘겼음에도 말이다. 몬스터들은 그런 소녀에게서 오싹한 기운을 느끼며 주춤거렸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몸 풀기는 끝!"
  그 말에 오한마저 느껴지는 몬스터들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직접 검으로 한 마리씩 베어 넘긴 소녀. 그런 소녀의 입에서 '몸 풀기는 끝'이라는 말이 나왔다.
  소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한 방에 보내주지."
  아무리 그래도 정확하게 62마리의 몬스터들을 한 방에 보낸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고위 대량살상용 마법이라면 모를까...
  번뜩!
  히죽거리고 있던 소녀의 은빛 눈동자가 갑자기 번뜩였다. 그것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드래곤의 눈동자, 드래곤 아이(dragon eye).
  소녀는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드래곤 아이의 등장에 몬스터들은 포효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소녀는 아직 해츨링인지 몬스터들의 발을 완벽하게 잡지 못했던 것이다.
  "멈춰!"
  하지만 해츨링이 드래곤 피어까지 사용하자 움찔하며 멈출수밖에 없었다. 아니, 드래곤 피어보다 그것을 압도하는 살기에 의해...
  드래곤 피어는 위엄이다. 살기와 위엄. 드래곤 아이 역시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순수한 살기는 달랐다. 드래곤 피어와 드래곤 아이는 상대를 공포로 물들게 만든다. 하지만 살기는 달랐다.
  드래곤 피어와 드래곤 아이가 절정에 달하면 중간계의 거의 모든 생명체는 버티지 못하고 두려움에 쇼크사 할 것이다. 하지만 살기가 극에 달하면 달라진다.
  살기를 뿜는 적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 후에 일어날 환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처참하게 죽어버리는 환상... 그것이 순수한 살기와 드래곤 피어, 드래곤 아이의 다른 점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이런 살기를 뿜으며 몬스터들에게 환상까지 보여준다는 것은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갑작스러운 환상에 몬스터들이 굳었다. 자신들의 몸을 한 번에 헤집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소녀의 모습. 이에 모두 굳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몬스터들이 굳어 있는 동안 그 환상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천마육십이환검!"
  소녀의 입에서 초식 이름이 튀어나왔다. 대륙 공통어가 아니었다. 리샨 대륙에 없는 언어로 지구의 중원어였다. 그녀가 펼친 것은 바로 중원 마교의 교주를 상징하는 천마검법의 환검의 초식이었다.
  초식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환검이 하나씩 늘어갔다. 전설속의 마교를 세운 첫 번째 교주인 천마는 실제로 천 개의 환검을 만들어 천의 절정고수를 가볍게 베었다고 전해진다.
  62개의 환검. 이것은 하나하나가 엄청산 절삭력을 가진다. 62개의 환검은 몬스터들을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쿠워어어어!
  크어어어억!
  취익! 취익! 꾸엑!
  몬스터들의 처절한 절규. 그렇게 몬스터들은 절규를 한 번 지르고 모두 갈기갈기 찢겨 죽어버렸다. 잔인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중원 마교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인간의 눈동자로 돌아온 소녀는 잔인한 광경을 뒤로한 채 그저 숲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데 어떻게 마교의 무공을 리샨 대륙의 드래곤인 그녀가 알 수 있을까? 게다가 실력 또한 현경으로 보였다, 리샨 대륙 식으로 따지자면 그랜드소드마스터 이상의 실력자였다.
  화경의 다음 경지인 현경. 내공 또한 3갑자 수준을 단전에 모으고 있었고 드래곤 하트의 마나 또한 5서클 급으로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에이라나. 전생의 이름은 하유현. 바로 마교의 14대 소교주였다. 자신을 반하는 무리에 의해 목숨을 잃고 리샨 대륙의 여자로 환생한 가엾은 그녀.
  그녀는 120살로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전 화경의 경지를 뛰어넘은 현경의 지고한 경지가 되어 마법보다는 검으로 수십 배는 뛰어난 상황에 있었다.
  그녀는 마나의 농도가 중원보다 몇 배는 짙고, 마나를 모으기에도 가장 좋은 몸이었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의 마나를 받아들여 검사와 무투가 등 무인들이 사용하는 기로 전환하기 쉬운 그녀가 아직 3갑자의 내공밖에 모으지 못한 것은 이상했다.
  일단 무인들이 사용하는 오러, 즉 강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기로 전환해야 했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하기 편하게 마나로 가공해야 했다.
  기와 마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마검사라는 꿈의 경지는 모두다 드래곤들이 이룬 업적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인간에게서 마검사가 탄생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드래곤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해서 생긴 마검사였던 것이다. 뭐, 인간보다 마나에 대한 친숙도가 뛰어나며 더 오래 사는 엘프들은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직 3갑자의 내공밖에 모으지 못한 에이라나였다.
  20년 동안 죽어라 내공을 모은 데다 드래곤이라는 타이틀까지...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3갑자라는 내공은 바로 해츨링이 모을 수 있는 기, 즉 내공량의 최대 용량이었던 것이다. 그 이상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드래곤 하트에 마나를 강제적으로 모으는 드래곤이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시도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인간이나 유사 인종들은 드래곤이 강제적으로 마나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타 유사 인종들이 마나를 모으는 방법처럼 말이다.
  드래곤들이 일상생활에서 한 번 호흡하는 양은 유사 인종들이 마나를 모으려고 작정하고 호흡하는 양의 수십 배는 되었다.
  드래곤은 이미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나를 강제적으로 모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드래곤이 마법의 종족이자 중간계에서 마나에 대한 지배력이 가장 강한 생명체라고는 하나, 마나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마나는 곧 자연이나 마찬가지니.
  9,000살이 넘어간다면 마나를 어느 정도 지배하여 더욱더 많은 마나를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죽기 전까지 미친듯이 마나를 모은다면 신룡(神龍)이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는 드래곤은 거의 없었다.
  9,000살 정도 되면 드래곤들도 엄청난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9,000살을 넘긴다는 것은 한낱 생명체에서 반신(半神)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그들이 세상의 이치를 파괴하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9,000살이 되면 1,000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생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어질 것이다.
  아무튼 해츨링들이 내공을 모은다면 그 최대 용량은 3갑자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질수록 그 용량이 늘어날 것이었다.
  성룡 때는 4갑자, 그리고 윔급 1,000~2,000살 까지는 5갑자, 2,000~3,000살 까지는 6갑자... 이렇게 총 1,000년에 최대 용량이 1갑자씩 늘어나(그렇다 해도 드래곤의 1갑자와 인간의 1갑자의 기의 양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총 13갑자의 내공이 한계일 것이었다.
  9,000살이 넘어가면 10클래스의 마법을 넘어 13클래스의 마법까지 익힐 수 있었다. 이는 완벽한 반신을 뜻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공과 마법의 클래스는 묘한 관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내공도 깨달음의 경지다. 그러나 아무리 깨달음이 높다해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클래스와 내공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뭐, 서클과 내공도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니까. 서클과 내공은 서로 마나의 힘이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이 비슷했다. 하지만 클래스는 9클래스 까지가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엿고 그 다음은 엄청난 깨달음과 의지였다.
  서클의 깨달음의 정도와 내공의 깨달음의 정도는 천지차이다. 서클은 바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연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고리였다. 물론 자신이 모은 마나의 양이기도 하고.
  그리고 클래스는 마법의 등급이다. 아무리 마법의 이론을 알고 있어도 그만한 마나가 따라주지 않으면 더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클래스는 쉽게 말해 공식일 뿐이다.
  다시 말해 서클이 높을수록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 이었다. 뭐, 드래곤은 그런 것이 필요 없겠지만. 그리고 내공. 내공은 서클과 비슷하다. 하지만 서클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기도 하다.
  내공은 아무리 높아도 자연의 마나를 사용할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자연의 것이 아닌 생물에게 종속된 기인 것이다. 고로 마나와 내공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렇기에 에이라나의 드래곤 하트에는 마나가, 단전에는 3갑자 급의 내공이 잠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마나를 저장하는 곳이 두 곳이라는 소리다.
  아무튼 내공이 서클과 다른 이유는 또 잇다. 서클은 클래스와 연관이 있다. 서클이 높으면 높은 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공은 다르다. 아무리 내공이 높다고 해도 더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서로 비슷하다고 하나 절대 다른 것이 서클과 내공, 클래스다.
  에이라나는 현재 마법보다는 무공이 훨씬 뛰어났기에 드래곤으로서는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아니, 아마 드래곤 역사상 처음으로 마법보다 무공(검술)이 뛰어난 드래곤일 것이다.
   *   *   *
  에이라나는 뻐근한 어깨를 풀며 경공술을 이용해 숲을 달리고 있었다.
  방금 160여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의 몬스터들을 전명시켰기에 피가 많이 묻어 있는 투박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 깔끔한 동작에 몬스터들의 피와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명검도 아닌 그저 투박한 검으로 내공을 이용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피와 살점을 떨처 내는 것은 그 동작이 그만큼 익숙하다는 뜻 이었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에이라나는 근처 호숫가로 가서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그리고 옷에 클린 마법을 써서 몬스터들의 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만약 옷에 묻어 있는 몬스터들의 피를 엄마가 본다면 그날로 죽음이다.
  예전에 에이라나는 멋모르고 몬스터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그때 에이라나의 나이가 101살 정도였을 것이다.
  에이라나가 죽을 뻔하자 이에 화가 난 에랴나니스는 근처의 몬스터들을 전면시켜버렸다. 그리고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간 조심성 없는 자신의 딸을 죽지 않을 정도로 패주었다.
  그 이후 에이라나가 몬스터들이 많은 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면 벌을 주는 에랴나니스였다. 그때 얼마나 놀랐으면...
  지금 에이라나가 입고 있는 곳은 중원식의 옷이었다.
  에랴나니스가 은색의 실크로 중원식 옷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분명히 남자 옷의 디자인밖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자 옷까지 만들었는지 정말 대단한 에랴나니스였다.
  에이라나는 나풀거리는 중원식 옷을 다시 입고는 땅을 박차고 경공술을 사용했다.
  에이라나는 지금의 삶, 즉 드래곤으로서의 삶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드래곤으로 태어나서 절규한 자시니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드래곤은 참 멋진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뭐, 여자로 환생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튼 재수 없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게도 지상 최고의 생물인 드래곤으로 태어났다. 게다가 꿈에 그리던 현경의 경지에 들어섰다. 에이라나는 생각했다.
  '이제 신화경과 생사경도 꿈만은 아니다!'
  드래곤의 수명은 만 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무인들의 전설인 생사경에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림의 최고의 무승 한안선사와 마교 천마 사마천만이 그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생사경... 그들은 이미 신선이 되어 중원 무림을 1,000년 동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 전설적인 경지도 꿈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 에이라나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보통 현경이 되었을 때는 4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그 최고 내공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직 3갑자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래도 에이라나의 무공은 고강한 경지에 이르렀다.
  에이라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에랴나니스의 레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만약 에이라나가 유희를 떠난다면 사상 최강의 검사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에이라나가 처음으로 리샨 대륙의 검술을 접했을 때의 반응은 이러했다.
  '버려!'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있는 비급 검술서를 보고 한 말은 한마디로 '버려!'였다. 얼마나 황당했으면 비급 검술서를 태웠을까?
  대륙의 검사들이 보았다면 침을 흘렸을 검술서인데 말이다.
  '뭐가 이렇게 단순무식 칼질이야? 차라리 삼재검법이 훨씬 낫겠다! 아니, 100배 1,000배는 더 삼재검법이 뛰어나겠다!'
  리샨 최고의 검술서가 중원의 삼류들이 익히는, 혹은 모든 검법의 기초가 되는 삼재검법만도 못한 검술서라는 뜻이었다.
   *   *   *
  에이라나는 오늘도 역시나 에랴나니스의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 전 에랴나니스의 보물고에 들어갔다가 반죽음 상태로 맞았던 경험이 있기에 그 이후로는 보물고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언제 왔는지 엘란카넌과 레랴나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내 손녀는 귀엽기도 하지."
  엘란카넌은 에이라나를 보며 웃으며 정말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레랴나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레랴나스 또한 자신의 손녀가 눈을 반짝이며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꼭 인간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았다.
  보통 인간들은 드래곤들이 자신들을 벌레 취급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많은 감정을 가지고 그것을 가장 쉽게 드러내며 가장 변화를 많이 하는 인간들에게 호감을 가진 드래곤들도 많았다. 그들의 역동적인 삶을 부러워하는 이들도 상당히 있었다.
  드래곤들은 인간들을 보며 여러 가지를 느낀다. 놀라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실망하고, 자신들의 심기를 건드려 자신들에게 죽어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겁대가리 없이 자신들을 뒤에서 씹기도 한다. 그것이 너무도 신기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는 생물은 너무도 새롭고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이 유희를 즐기며 인간들과 섞여 사는 것이었다.
  엘란카넌과 레랴나스도 그런 드래곤들 중 하나였다. 그런 자신들의 손녀가 인간 같은 면이 적지 않자 신비롭기도 했다.
  에이라나는 다 읽었는지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엘란카넌과 레랴나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 할머니, 할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자신들이 온 것을 못 느꼈는지 에이라나가 당황하며 묻자 레랴나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음, 네가 그 책을 막 집었을 때?"
  그러자 더욱 당황한 에이라나가 말했다.
  "죄송해요."
  레랴나스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다, 기척 죽인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
  그렇게 말하고는 에이라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레랴나스였다.
  "그래, 어떤 책을 읽고 있니?"
  에이라나는 베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각 마스터에 대한 책이에요."
  에이라나가 들고 있는 책은 각 분야의 마스터에 관한 것으로, 이 세계를 말하자면 검사, 무투사, 투사 같은 오러 블레이드, 즉 검강을 사용하는 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곳 무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뼛속까지 무인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전설만으로는 제대로 이곳 무인들의 실력을 알 수 없었다. 중원보다 강한지 약한지 말이다.  에이라나가 무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듯하자 레랴나스가 물었다.
  "우리 에이라나는 무인들에게 관심이 많나 보구나?"
  레랴나스는 살며시 에이라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에이라나가 대답했다.
  "네! 전, 무인에게 관심이 많아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꺅! 우리 손녀 귀여워!"
  레랴나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에이라나를 꽉 껴안았다. 그래도 여자는 여자였다. 레랴나스의 이런 행동에 에이라나가 얼굴을 붉혔다. 에랴나니스가 에이라나에게 매일 하는 행동이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레랴나스를 보며 엘란카넌이 말했다.
  "크흠! 그렇게 안으면 에이라나가 무안해하잖아?"
  엘란카넌은 재빨리 에이라나를 구해주는 말을 했다. 그의 말에 레랴나스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에잉~ 귀여운데."
  레랴나스는 품에서 에이라나를 살며시 놓아주었다. 그러자 엘란카넌이 말했다.
  "그렇게 관심이 많다면 서재에 비급 검술서가 있을 테니 한번 보렴."
  "비급 검술서?"
  에이라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자 엘란카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단다. 저쪽 근처에 있을 게다."
  그는 서재 한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에이라나의 눈이 빛났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는 신이 나서 넓은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레랴나스가 엘란카넌을 살짝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당신!"
  "유치하게 왜 그래?"
  손녀 앞에서는 철저하게 유치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보며 한숨을 쉬는 엘란카넌이었다.
   *   *   *
  검술서를 찾기 시작한 에이라나의 눈에 보인 검술서!
  <일루전 소드>
  그렇게 검술서에 손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우리 딸~ 오늘은 어떤 책을 보려고?"
  그렇게 말하며 에랴나니스는 에이라나의 눈앞에서 검술서를 빼앗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는 짓궃은 미소를 지으며 책을 보았다.
  "에엑~ 검술서? 이런 건 왜 보는 거니?"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냥 어떤 건지 궁금해서. 이제 줘."
  에이라나는 검술서에 손을 뻗었다.
  표지가 가죽으로 되어 있어 중원의 비급보다 훨씬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긴 했지만 말이다.
  에이라나가 손을 뻗었지만 에랴나니스는 그저 히죽 웃으며 손을 위로 올려 에이라나의 손이 책에 닫지 못하게 했다.
  에랴나니스는 약 175cm로, 여자 치고는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에이라나의 키도 170cm정도 됐으므로 팔짝 뛰면 잡을수 있겠지만, 에랴나니스가 에이라나의 머리를 잡고 못 뛰게 방해하고 있었다.
  "이익! 줘!"
  "어허 ~ 엄마한테 말투하고는!"
  은발에 은안의 미녀들이 책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은 꼭 모녀가 아닌 자매 같았다.
  퍽!
  "컥!"
  갑자기 누군가가 에랴나니스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놀란 에랴나니스가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등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은안을 가진 미남자가 에랴나니스를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엘란카넌이었다.
  그런 엘란카넌을 보며 찔끔한 에랴나니스였다.
  퍽!
  "커억!"
  에랴나니스는 다시 등 뒤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신음을 토했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에랴나니스의 턱을 가격하는 엘란카넌!
  퍽!
  "켁!"
  쿠당!
  결국 쓰러진 에랴나니스. 에랴나니스의 등을 공격한 것은 레랴나스였다. 등을 발로 냅다 갈긴 것이다.
  엘란카넌이 말했다.
  "내가 애 괴롭히지 말랬지? 네가 그러고도 얘 어미냐?"
  에랴나니스의 손에서 검술서를 빼앗은 엘란카넌이 에이라나에게 검술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라나는 익숙한 일인 양 검술서를 받고 어미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이제껏 에랴나니스는 에이라나가 원하는 물건을 빼앗아 약올린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에랴나니스는 엘란카넌이나 레랴나스에게 걸려 얻어터지고는 했다.
  "오늘 좀 맞자."
  역시나 레랴나스가 에랴나니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는 에랴나니스는 그저 절규할 뿐이었다.
  엘란카넌이 에이라나에게 생긋 웃어준 다음 얼굴을 찡그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참 무서운 드래곤 가족이었다.
   *   *   *
  방해꾼이 사라지자 에이라나는 자리에 앉아 검술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제는 느긋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검술서를 읽을수록 에이라나의 얼굴은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다섯 페이지 읽었을까? 에이라나는 잠시 멈칫했다.
  딸을 죽지 않을 만큼만 패고 돌아온 레랴나스와 엘란카넌, 그리고 거의 죽어가는 에랴나니스는 갑자기 에이라나가 책 읽기를 끝내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에이라나가 검술서를 읽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속독을 하지 시작했다. 대충 훑어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 드래곤.
  잠시후...
  휘익!
  탁!
  "이 따위가 무슨 검술이야! 이렇게 하다가는 근육 파열되겠다! 무식하게 힘에 치중해서 환검을 어쩌겠다는 거야? 그리고, 뭐? 냅다 휘두르다가 보면 내공이 쌓여서 검강을 사용한다고?"
  에이라나는 검술서를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달려가 검술서를 밝기 시작했다.
  "씁! 이 따위 말대로라면 중원 삼류들도 여기 오면 기사하겠다! 아니! 마교가 오면 완전 리샨 대륙 제패?"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발광에 당황하는 세 드래곤. 그들은 에이라나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손녀, 딸은 대륙의 검술에 실망한 것이다. 그래서 너무도 황당하고 짜증이 나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그들의 판단이 정확했다. 에이라나는 죽어도 검술에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무인이니깐. 하지만 이 대륙에 대해서는 실망했다.
  일례로, 에이라나가 본 '일루전 소드'라는 것은 이러했다. 검에 마나, 즉 기를 불어넣어 검의 강도를 강하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중원 무림으로 따지자면 삼류 수준의 검사가 정해진 방법대로 강한 힘으로 검을 어지럽게 휘두르는 것.
  물론 정해진 방법대로 휘두르는 것은 중원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정해진 길로 검을 휘두르다 익숙해지만 그것을 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휘두르는 방법이었다.
  일루전 소드에 나와 있는 방법은 강한 힘을 이용해 휘두르는 것이다. 그래서 중원 환검의 특징인 현란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급소를 공격하는 날카로움이 모두 없었다. 오히려 삼재검법을 이용해 환검으로 응용하는 것보다 못했다.
  삼재검법은 모든 검의 기초이기는 하나 모든 검의 끝이기도 했다.
  옛날 정파의 한 삼류 무사가 이유도 없이 정파에서 배척 받아 마교로 흘러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저 명분을 만들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그 삼류무사는 그에 대한 분노로 절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8대 교주가 마음에 들어 했고, 수련동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는 삼재검법과 삼재심법만을 가지고 수련동에 들어가 30년을 살았다. 오직 교주만이 그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모두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가고 있을 때쯤, 그가 나왔다! 교주를 뛰어 넘는 경지인 산화경을 이루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8대 교주에게 검을 들이밀지 않았다.
  '나에게 기회를 줘서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저 혼자 무림맹을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부탁을 교주는 들어주었고 혈천마대 중제 1마대와 함께 무림맹에 보냈다.
  현겅의 경지는 이곳으로 말하자면 1,000살 된 드래곤의 힘과 맞먹는 경지이다. 그리고 산화경은 5,000살 에이션트 급의 드래곤과 맞먹는 힘을 가진 경지였다.
  무림맹은 그 날로 불바다가 되었다. 무림 역사상 그 경지에 오른 자가 10명도 되지 않는다는 신화경! 결국 정파 무림맹은 다음에 찾아온 마교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사파와 연합해 겨우 마교를 밀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삼재천검'이라는 칭오와 함께 무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이 세계에서는 가장 검을 잘 휘두르는 자들은 기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중원무림 삼류 무사들은 전부 기사급의 검사였다. 이런 황당한 검술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에이라나가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으니...
  "파이어 볼!"
  쾅!
  결국 파이어 볼을 날리는 것으로 '일루전 소드'라는 리샨 대륙의 비급 검술은 매장되어버렸다. 뭐, 다른 드래곤들의 레어나 제국 황성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검술서를 보며 엘란카넌이 말했다.
  "에이라나야, 책은 함부로 태우는 게 아니란다. 불장난하면 못써요."
  레랴나스도 한마디 했다.
  "역시 레드드래곤의 피가 섞인 것인가? 성격이 조금 불같군."
  에랴나니스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어머니 닮으면 안 되는데."
  꼭 맞을 짓을 해요.
  퍽!
  "켁!"
  "뭐라고?"
  바로 관자놀이를 팔꿈치로 가격하는 레랴나스였다.
  "죽고 싶지?"
  차갑게 말하며 드래곤 피어까지 뿜는 레랴나스. 에랴나니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하, 어무이 용서해주십시오."
  레랴나스가 말했다.
  "두고 보자."
  그 말에 에랴나니스가 발끈하며 말했다.
  "악!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레랴나스는 바로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캭! 죽고 싶지?!"
  그러나 에랴나니스는 만만치 않았다.
  "캭! 죽여 봐요!"
  우당탕탕! 쾅! 콰가가가가가가가강!
  싸우기 시작하며 역시나 마법을 난사하는 두 모녀. 하지만 엘란카넌은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에이라나야, 그렇게 함부로 책을 태우면 안 된단다, 네가 검술에 실망해서 짜증이 난 것 같은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네 피의 1/3에 레드 일족의 피가 흐른다 해도 말이다."
  에이라나의 피에는 세 드래곤 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실버 일족의 피가 가장 많이 흐르고 다음이 블랙 일족, 마치막이 레드 일족이었다. 1/3은 단지 숫자일 뿐, 사실 가장 적은 양은 레드 일족이었다.
  에이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하지만 그렇게 다혈질인 사람은 에이라나만이 아니었다. 에랴나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장담하건데 가족 중 가장 성격이 더러운 것은...
  쾅!
  "캭!"
  "캭! 진짜 뭐에요! 왜 남의 레어에 있는 서재 박살내요?"
  바로바로...
  "시끄러워! 헬 파이어!"
  쾅! 콰가가가가가강!
  "꺅!"
  "드래곤 살려!"
  엘란카넌일 것이다. 아무튼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   *   *
  어느새 경골술로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도착한 에이라나.
  에이라나는 완전 초토화되어 있는 레어(에이라나가 늘 마법을 날려서 그렇다.)의 앞마다을 지나 에랴나니스의 레어로 들어갔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레어에 들어가며 말하는 에이라나. 하지만 에랴나니스는 외출중인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에이라나였다.
  "얼라? 외출했나?"
  에이라나는 서재에 들어가서 책 하나를 집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에이라나가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우웅!
  갑자기 레어 한쪽에 워프 마법진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에이라나.
  원래 드래곤의 레어에는 하나씩 워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게 그 순간 갑작스러운 빛과 함께 여러 인영이 나타났다. 기운으로 봐서는 해츨링급의 드래곤들이었다.
  그런데 해츨링들이 단체로 에랴나니스의 레어에는 왜 왔단 말인가?
  라이탄, 리얀, 카타란, 로리나스, 레니스, 카라넴, 랸, 카리칸, 에이라나. 현 드래곤 일족 해츨링들을 나이순으로 나열한 것이다. 에이라나가 막내라고나 할까?
  아무튼 에이라나가 느긋하게 책을 읽고 있을 때 여덟 해츨링이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찾아왔다.
  당연히 의하해하는 에이라나였다. 저 드래곤들은 자신이 이름 지을 때 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래곤들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갑작스럽게 찾아온 여덟 명에게 에이라나가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자신보다 나이가 많기에 일단 존대를 해주었다. 에이라나의 질문에 라이탄이 말했다.
  "이야~ 에이라나, 오랜만이구나? 120년 만이지?"
  '120년 말이긴 하지. 그런데 120년 만에 무슨 일로 찾아왔냐니깐?'
  속은 삐딱한 에이라나였다. 그녀는 라이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름이?"
  그때 이들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라이탄을 기억 못하는 에이라나였다. 아무튼 에이라나의 말에 라이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것도 기억 못하냐? 기억력이 나쁘군."
  어디선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레니스였다.
  원래 드래곤은 한 번 본 것은 거의 기억하는 생물체였다. 망각의 축복이 없는 종족이랄까?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힐끔 본 드래곤을 어떻게 알겠는가? 기억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 빈정거리는 레리스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아 ~ 넌 기억난다. 욕 좀 먹었다고 찌질하게 구석에 처박혔던 놈이지?"
  그 말에 휘청거리며 신음을 토하는 레니스.
  "컥!"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말싸움을 걸었을까? 에이라나는 완벽하게 레니스를 보내버렸다.
  "쯧! 겨우 이런 말에 비틀거리기는!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아깝다."
  K.O! 에이라나의 K.O 승이었다. 에이라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구석으로 들어가 쭈그리고 앉는 레니스였다. 그런 레니스를 보고 라이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말싸움은 그만하고... 음, 기억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난 라이탄. 그린 일족의 해츨링이며 지금 해츨링 중 가장 나이가 많지. 그리고 이쪽은."
  그렇게 라이탄이 해츨링들을 소개해주었다.
  "이쪽이 너를 제외한 해츨링 중 가장 막내인 카리칸이야."
  에이라나가 카리칸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리칸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적발에 적안을 가진 미남자였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고개를 딴 쪽으로 돌릴 뿐이었다.
  그것에 시무룩해지는 카리칸.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에이라나가 물었다.
  "그것보다, 단체로 무슨 일이죠?"
  에이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어느새 기사회생한 레니스가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우린 인간 사회에 놀러갈 거야."
  순간 정적이 흘렀다. 에이라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레니스를 쳐다보았다. 레니스 또한 에이라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 무안해졌는지 헛기침을 했다.
  에이라나는 가장 나이가 많은 라이탄에게 물었다.
  "저 말 사실이에요?"
  라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이라나가 다시 물었다.
  "이 어이없는 계횔을 짠 건 누구? 저 개념 없는 레니슨가 레이스?"
  그러자 레니스가 바로 반발했다.
  "캭!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입 닥치시고."
  에이라나의 한마디에 레니스는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자 라이탄이 말했다.
  "나랑 리얀이 계획했어. 나머지 애들은 자신들도 가보고 싶다고 했고."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흐음... 난 저 자식이 계획한줄 알았는데."
  그리고 레니스를 힐끔 쳐다보는 에이라나. 이에 바로 반발해주는 레니스.
  "캭! 이게 진짜!"
  에이라나는 레니스의 말을 완벽하게 씹어주었다.
  "뭐, 아무튼 인간사회에 나가는데 왜 저를 찾아신 건지 궁금하네요."
  에이라나가 의아해하며 말했다. 사실은 정말 궁금했다. 자신은 평소에 이들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름을 지을 때 한 번 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런 에이라나의 궁금증은 리얀이 해결해주었다.
  "응? 몰라서 물어? 같이 가자고."
  "예에?"
  중원을 생각나게 하는 아버지 캬라만과 같은 검은 머리색과 흑요석 같은 눈동자, 그리고 마교를 생각나게 하는 기운은 가진 리얀.
  그래서 그런 걸까? 그녀는 리얀에게 큰 호감이 갔다. 리얀이 고운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자, 에이라나."
  리얀의 말에 에이라나가 순간 당황했다. 친하게 지낸 적 없는 리얀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감까지 가는 그녀가 아닌가? 다른 이들도 에이라나에게 호감은 있어도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지는 않는 듯한데 말이다.
  아무튼 리얀의 권유를 에이라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절대적으로 거절해야 했다. 엄마에게 이 일로 걸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죽음이었다. 레랴니스와 엘란카넌, 카랴만이라는 방패도 없이 쓸쓸하게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라면 나를 겹겹이 포를 떠버릴지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안해요. 전 생각 없어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목숨을 가지고 도박할 필요는 없었다. 에이라나의 말에 리얀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니스는 에이라나를 비꼴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는 듯 비아냥 거렸다.
  "흥! 겁쟁이네? 겨우 그 정도에 겁먹어서는!"
  하지만 레니스는 절대 에이라나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지랄하고 앉았네. 개념 없이 나갔다가 걸려서 죽도록 맞는 것 보단 낫거든? 몇 백 년 뒤면 실컷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그것도 못 찾고. 쯧!"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는 다시 K.O 되었고, 라이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작전은 잘 짠 상태야. 그리고 지금 가보면 뭔가 재미있을 것 같거든."
  '그래도 걸린다.'
  에이라나는 확신했다. 다른 해츨링들은 몰라도 에이라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날고 뛰어 봤자 부모들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에이라나 뿐인 듯 했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 아무튼 전 피곤해요. 안 갈 거예요."
  에이라나의 말에 라이탄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쉽군.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라이탄이 에이라나를 바라보는 눈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러자 리얀이 라이탄을 놀리듯 말했다.
  "라이탄 씨 ~ 에이라나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은데, 그런 눈으로 바라보다 죽는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라이탄을 노려보는 리얀.
  그러자 라이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도 그렇게 감싸는 건..."
  그러자 리얀이 말했다.
  "무슨 소리! 나랑 가까운 혈육으로 되어 있는 동생이라고! 언니로서 늑대들로부터 동생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
  그 말에 에이라나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리얀을 쳐다보았다. 그렇다! 리얀은 에이라나의 사촌언니였던 것이다. 그렇게 리얀이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너희들! 에이라나한테 찝쩍이면 죽어!"
  남자 드래곤들을 노려보는 리얀. 아무튼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에이라나가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체 자신의 가족은 어떻게 된 것일까? 뭐, 자신도 청혼한답시고 달려오는 드래곤들에게 죽일 듯 달려들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보다 가족들이 더 날뛰는 것 같았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튼 전 안 갈 거예요."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라이탄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인간 세상에 나갔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에이라나를 보며 라이탄이 말했다.
  "고마워, 그럼."
  그렇게 말하고 다른 해츨링들에게 가자는 말을 했다.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온 것은 에이라나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인간들의 마을과 영역이 붙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랴나니스와 카랴만이 함께, 매일 에이라나를 찝쩍거리러 오는 드래곤들에게 제제를 가해달라고 부탁하러 로드의 레어에 갔기 때문에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에이라나가 안 가서 아쉬운 해츨링들도 많았지만(거의 남자 해츨링들) 그래도 안 갈수는 없었기에 에이라나에게 다짐을 받아내고 에랴나니스의 영역인 에타고르 산맥을 내려가는 여덟 해츨링들이었다.
  에이라나는 나른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신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다.
   *   *   *
  리샨 대륙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누구일까?
  검의 끝을 보고 있다는 그랜드소드마스터 라타파칸?
  아니면 인간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9서클 마법사 리푸노스.
  현 리샨 대륙에서 검과 마법의 절정에 다다른 사람은 이 둘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둘 다 리폰 제국 최고의 기사, 마법사라고 불렸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최고의 레인저 활에 오런 블레이드를 둘러 쓸 수 있는 리폰 제국의 궁기단 단장 아프다, 근위기사 최상급 소드마스터 단장 마칸, 8서클 마스터 마법사 아나로. 이 다섯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죽마고우인 3남 2녀로 어릴 적에는 친한 친구로, 자라서는 동료로, 그리고 명성을 쌓은 다음에는 제국의 고위직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서 함께하고 있었다.
  벌써 그들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다섯 사람 모두 엄청난 경지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삼십대 초반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처럼 평민이 고위직을 맡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다섯 모두 엄청난 재능과 피를 토하는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에랴나니스의 영역인 에타고르 산맥에 마법사 30명과 기사 500명을 이끌고 와 있었다. 죽으려고 환장한 것인가? 겁 없이 에랴나니스의 영역에, 그것도 전투인원을 데리고 들어오다니.
  "이제 며칠만 더 들어가면 마룡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도착할 것입니다."
  한 기사가 영광스럽다는 듯 라타파칸 옆에서 말했다. 그는 소드마스터 초급의 경지에 있는 자 같았다.
  아니,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기사의 말을 따지자면, 지금 그들은 모르고 들어온 것이(모르고라도 들어왔겠는가?) 아니라 이곳이 에랴나니스의 레어라는 것을 알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에랴나니스를 적대시 하고 말이다.
  과연 인간들이 미친 것인가? 이들의 미친 짓을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20년 전 리폰 제국에 난동을 부린 마룡 에랴나니스를 응징하고 목에 검을 꽂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에랴나니스가 들었다면 아마 리폰 제국의 인간이란 생명체는 다 죽었을 것이다. 이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120년 전이라면 에이라나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에랴나니스는 아기를 낳기 전에 마지막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리폰 제국의 황태자가 에랴나니스를 강제로 잡기 위해 습격했었다. 아마 노예로 쓸 생각 같았다. 뭐, 유희를 즐기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더러운 성격인데 임신 중이라 더 신경이 날카로워진 에랴나니스를 덮친 게 잘못이었다. 아니, 실패했으면 그만두면 되었을 것을 에랴나니스가 방심하고 있을 때 공격을 퍼부어 잘못하면 뱃속에서 고이 잠자고 있던 알, 그러니깐 에이라나가 그대로 소멸할 뻔한 것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임신 중에는 많이 약해져 있고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상태든 드래곤의 상태든 일단 배를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방심하는 사이 화살 하나가 에랴나니스의 배에 꽂힌 것이었다. 이에 눈이 뒤집힌 에랴나니스가 바로 폴리모프를 해제한 후 황태자를 잡아 갈기갈기 찢어 죽은 것은 물론이요, 제국의 황성에 브레스를 날려줬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귀족들과 황족들이 몰살당해버렸다. 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수도를 옮기게 된 리폰 제국이었다. 분명 에랴나니스의 잘못도 있지만 리폰 제국의 잘못도 있었다.
  그런데 리폰 제국은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에랴나니스에게 그 잘못을 모두 떠넘겨버렸다. 카랴만, 엘란카넌, 레랴나스가 나서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데 말이다.
  그런 에랴나니스를 잡겠다고 라타파칸, 리푸노스, 아프타, 마칸, 아나로를 믿고 에랴나니스를 처치하라고 명한 리폰 제국의 황제. 그리고 그것을 수락한 다섯.
  아무리 그들이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들이라도 드래곤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로 잘해 봐야 성룡 정도의 드래곤과 호각을 이룰 만했다. 아니, 그러다가 밀릴 것이다.
  그리고 9서클 마법사.
  마법사와 드래곤은 다르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 동안 드래곤은 마법명만 대면 마법이 실현되었다. 에이션트급 드래곤들은 '죽어라!' , '찍어 죽여라!' 등 간단한 말만으로도 상대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용언까지 있었다.
  그들은 결코 에랴나니스를 이길 수 없었다. 에랴나니스가 브레스 한방만 뿌리면 아름다운 얼음조각이 완성될지도...
   하지만 그들은 다섯의 힘과 마법사, 기사들을 믿었다.
  500명의 기사들 중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오른 기사들도 제법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500~800살 성룡 드래곤은 잡아 죽일 수는 있어도 800살이 넘어가면 브레스의 위력이 강화되기 때문에 잡을 수 없을 것이다. 9,000살 13클래스의 반열에 오른 그래곤들의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는 것은 신들도 꺼려한다.
  에랴나니스를 잡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에랴나니스는 외출한 상태였던 것이다.
  라이탄, 리얀, 카타란, 로리나스, 레니스, 카라넴, 랸, 카리칸.
  여덟 해츨링이 에랴나니스의 영역인 에타고르 산맥을 타고 인간들의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다.
  라이탄과 리얀은 워프할 수 있겠지만 워프하면 걸릴 가능성이 있기에 이렇게 산을 타고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라이탄이 말했다.
  "아, 에이라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것을."
  라이탄은 에이라나가 좋았다. 첫눈에 반했다고나 할까? 그때 레니스가 투덜거렸다.
  "쳇! 그런 말괄량이가 뭐가 좋다고."
  그러자 로리나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 너, 에이라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레니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안 좋아해!"
  그러자 카라넴이 말했다.
  "호~ 그럼 레니스 형은 경쟁상대에서 빠지는 건가?"
  카라넴의 말에 레니스가 도끼눈으로 카라넴을 노려보았다.
  에이라나가 들었다면 발광했을 그들의 대화는 리얀에 의해 끊겼다.
  "계속 그 주둥아리 나불대면 죽을 줄 알아!"
  레드 일족 다음으로 성질 더러운 블랙 일족이다. 그 성질이 어디 가겠는가? 리얀의 경고에 입을 다무는 남자 드래곤들이었다.
  그들이 입을 다문자 리얀, 로리나스, 랸, 이렇게 여자애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남자애들도 어디를 어떻게 여행 다닐지 지도를 꺼내서 열심히 토론하고 있을 때였다.
  멈칫!
  갑자기 라이탄과 리얀이 멈칫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둘이 멈칫하자 의아해하는 여섯 드래곤. 그때 리얀이 물었다.
  "라이탄 오빠."
  "왜?"
  리얀과 라이탄의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는 것은 착각일까?
  "에랴나니스 님의 영역에도 인간이 있어?"
  리얀의 물음에 라이탄이 말했다.
  "아니."
  그러자 리얀이 물었다.
  "그럼 지금 느껴지는 이 강력한 기운과 상당한 숫자의 인간들의 기척은 뭐지?"
  리얀의 물음에 다시 라이탄이 말했다.
  "글쎄다."
  잠시후...
  "이런 젠장! 인간들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라이탄과 리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야?"
  레니스가 갑작스러운 둘의 반응에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자 라이탄이 말했다.
  "인간이다! 인간들이 에랴나니스 님의 영역에 들어왔어!"
  "뭣? 이것들이 미쳤나!"
  라이탄의 말에 레니스도 버럭 소리쳤다. 해츨링들은 겁 없이 이곳에 들어온 인간들이 어이없을 뿐이었다.
   *   *   *
  라타파간과 리푸노스가 멈칫했다. 라타파칸이 말했다.
  "기척 여덟."
  리푸노스도 말했다.
  "강력한 마나가 여덟."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들인지. 아무튼 그들이 기척을 느끼는 감각과 마나를 느끼는 감각은 정말 뛰어난 것 같았다.
  리푸노스가 말했다.
  "해츨링들 같군."
  리푸노스의 말에 라파타칸이 물었다.
  "해츨링?" 
  그러자 아프타가 말했다.
  "해츨링들이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그러자 아나로가 말했다.
  "아무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듯해. 우리 목표는 에랴나니스지 해츨링들이 아니야! 내 말 들어!"
  아나로가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기사들은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타파칸이 먼저 그쪽으로 뛰어가서 그런것 같았다. 리푸노스가 라타파칸을 막았다.
  "라타파칸, 뭐 하는 짓이야!"
  그러자 라타파칸이 말했다.
  "비켜! 해츨링도 일단 드래곤이잖아!"
  그러자 아프타가 말했다.
  "진정해! 네가 드래곤을 싫어한다는 건 잘 알아! 하지만 해츨링을 건드리면 안 돼! 그리고 여덟이라며! 만약 그들을 건드린다면 리폰 제국은 드래곤들의 공격을 받을 거야!"
  덤으로 멸망하겠지.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쳐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멸망의 위험성이 보인다만. 아무튼 그 말에 멈칫하는 라타파칸. 아나로도 라타파칸에게 말했다.
  "그래, 라타파칸. 우리 목표는 에랴나니스지 해츨링들이 아니야."
  하지만 꼭 초치는 것들이 있어요.
  "하지만 해츨링들이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리면 큰일이잖아?"
  마칸이었다. 그러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기사들과 마법사들.
  맞는 말이기도 했다. 해츨링들이 종족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이들은 좀 더 빨리 세상을 하직할 것이었다. 마칸의 말에 라타파칸이 리푸노스에게 말했다.
  "일단 사로잡기라도 하지.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해츨링들에게는 마나봉인 팔찌가 통할 거다."
  마나봉인 팔찌는 7서클 마법사의 마나까지 봉인 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들의 수중에는 리푸노스가 만든 8서클의 마나까지 봉인할 수 있는 팔찌까지 있었다.
  아무튼 라타파칸의 말에 할 수 없이 해츨링들을 사로잡기로한 그들이었다. 라타파칸은 드래곤을 싫어했다. 드래곤에게 큰 원한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라타파칸은 마을이 아니라 산에서 조부모님,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산은 마을과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따라 마을에 갔다가 넷과 만나 죽마고우가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어이없게도 용병 일을 하러 떠나기 직전 산에서 나왔을 때 블랙드래곤의 브레스가 산에 떨어졌다.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라타파칸은 순간 멍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특히 블랙드래곤을 싫어하는 라타파칸이었다.
  그런데 라타파칸은 알까? 그 블랙드래곤이 지금 자신들이 처치하러 가는 에랴나니스의 남편 카랴만이라는 것을...
  뭔가에 분노해서 브레스를 날린 블랙드래곤 카랴만. 하지만 브레스를 날린 이유는 정말 시답지 않은 것이었다. 바로 에랴나니스와 부부 싸움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라타파칸이 들었다면 정말 원통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라타파칸이 불쌍할 뿐이다.
  부부싸움을 하게 된 원인은 바로 에이라나 때문이었다.
  아직 카랴만과 에랴나니스가 화해하기 전이었는데 카랴만이 자신도 에이라나를 보고 싶다고 에랴나니스에게 따졌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에이라나가 태어나기 전 카랴만과 에랴나니스는 크게 싸웠었다. 뭐 카랴만이 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때 산이 날아갔을 때에도 카랴만이 졌다. 그렇다. 카랴만은 에랴나니스에게 이긴 적이 없었다.
  어라? 이게 아니지. 아무튼 그 이후 에랴나니스는 치졸하게 복수한답시고 에이라나를 카랴만에게서 절대 보호하는 바람에 아버지인데도 에이라나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랴나니스에게 아빠가 딸도 못 보냐고 따졌다.
  그러나 에랴나니스는 가볍게 씹을 뿐.
  카랴만이 계속 따지자 마법을 난사한 에랴나니스. 카랴만도 방어하느라 급급했고 결국 폴리모프 해제까지 갔다. 계속 도망치다가 할 수 없이 브레스를 한 방 뿌리고 튀어버린 카랴만이었다. 에랴나니스를 제압하면 되겠지만 드래곤 역사상 초유의 공처가인 그가 아내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브레스의 결과로 산 하나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라타파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사실을 라타파칸이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라이탄이 슬쩍 인간들의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굳었다.
  멀리서도 강력한 기운을 뿌리고 있던 그들. 특히 맨 앞에 있는 다섯 중 셋은 라이탄과 리얀에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라이탄과 리얀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인간은 성룡급 드래곤과 맞먹는 힘을 가진것 같았다.
  "끄응 ~ 그랜드소드마스터."
  그랜드소드마스터.
  그것은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그 반열에 오른 이를 존중해줄 정도로 지고한 경지였다.  
  라이탄은 라타파칸을 본 다음 리푸노스를 쳐다보았다.
  "9서클 마법사... 젠장!"
  라이탄이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자신은 아직 끽해야 8서클 유저 수준의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덟 드래곤은 인간들의 무리에 상당히 가까이 와 있는 상태였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마스터라 불리는 인간이 여러 명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드래곤에 대한 도전이다.
  라이탄이 얼굴을 굳히고 리얀을 쳐다보았다. 당장 어른들에게 알리라는 신호였다. 저들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었다. 전문용어로는 다구리! 즉, 협공을 하면 어떻게 방법이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가서 자신들이 그들을 협공하다가는 오히려 뒤에 있는 마법사와 기사들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숫자도 많았다.
  그렇게 리얀이 어른 드래곤들에게 이상을 알리려고 마법을 준비했고 라이탄은 나머지 여섯 해츨링을 다독이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쾅! 콰가가가가가가강!
  "제길, 들켰다!"
  갑자기 맨 앞에 있던 그랜드소드마스터로 보이는 이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들이 숨어 있는 쪽을 쳐다보더니 오러블레이드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라이탄은 소리치며 그레이트 실드를 만들었다.
  쨍그랑!
  "커억!"
  그레이트 실드는 깨졌고 그 충격에 라이탄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라이트닝 오브 스트라이크!"
  리얀이 7서클 주문을 날렸다.
  "월 오브 아이스!"
  챙! 콰가가가가강!
  하지만 7서클 빙계마법에 막히고 말았다. 리얀은 마법을 쓴 이를 쳐다보았다. 8서클 마스터로 보이는 인간이었다. 바로 아나로였다.
  리얀은 초록색 눈동자에 금발을 가진 예쁘장한 30대 초반의 여인을 보며 긴장했다. 자신보다 그녀가 강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투는 태연했다.
  "예쁘게 생겼네?"
  "후후후, 고맙습니다."
  리얀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더 예뻐!"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사실이었다. 리얀은 흑발에 흑안을 가진 10대 후반의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나로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사람 좋은, 그리고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리얀을 보며 말했다.
  "네~ 저보다 블랙 일족의 해츨링께서 더 예쁘네요."
  그러자 순간 당황하는 리얀이었다. 도발 하려고 했는데 왠지 자신이 말려든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쪽은 어색한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쳇! 9서클 마법사의 인간이라... 대단하잖아?"
  라이탄이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리푸노스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칭찬 고맙군. 그것보다 난 해츨링들이 이런 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궁금한데?"
  라이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재수 없게 내려오다가 이런 강한 인간들을 만날게 뭐란 말인가? 리푸노스는 그런 라이탄의 생각을 읽었는지 웃으며 말했다.
  "아~ 가충 중이셨구만?"
  그러자 라이탄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런 라이탄을 보며 킥킥거리는 리푸노스였다.
  라이탄은 생각했다.
  '젠장! 오래 산 건 아니지만 내 인생 최대의 위기다!'
  아무튼 이곳은 양호한 편이었다. 서로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난장판이었다.
  "괴물!"
  레니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라타파칸은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인간이 뭐 이딴 식으로 강해!"
  그러자 라타파칸의 표정이 변했다.
  “인간을 무시하지 마라, 도마뱀!"
  쾅!
  "크아아아아악!"
  레니스가 라타파칸이 날린 검풍에 날아가 쓰러졌다.
  쿵!
  내상을 입었는지 기침을 하다 기적하는 레니스였다.
  "저 바보! 차라리 도발을 하지 말지!"
  나머지 다섯 드래곤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셋을 맡아 절규하며 싸울 뿐이었다.
   *   *   *
  책을 읽고 있던 에이라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뒈지려고 엄마의 레어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지?"
  에이라나는 갑자기 느껴지는 강력한 마나의 파동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감히 여기서 난동을 피운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에이라나가 다시 책을 읽으려고 할 때였다.
  "응? 잠깐, 지금 마나의 파동이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대단위 마법을 난사한다는 뜻인데."
  갑자기 든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싸우고 있는 건가?"
  에이라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젠장! 이거 라이탄과 리얀의 기운이잖아!"
  라이탄과 리얀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떠난 지 이틀이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산맥 끝자락에 도착했다는 소리! 그런데 산맥 끝자락에서 여기까지 민감하게 마나가 느껴진다는 것은!
  "젠장! 큰일이다!"
  싸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는 상대의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의 대단위 마나를 가지고 싸우는 이들이라니! 에이라나는 경공술을 이용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   *   *
  "크윽!"
  라이탄이 신음을 토했다. 그의 마나가 완전 고갈되었다.
  라이탄은 아직 여유로워 보이는 리푸노스를 보며 속으로 소리쳤다.
  '크윽! 생각보다 더 강해!'
  리푸노스는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젠장! 내 인생 최대의 위기다!'
  리푸노가 말했다.
  "이제 그만 항복하는 게 어때? 해는 가하지 않을게."
  그러자 라이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공격은 해를 가하는 게 아닌가?"
  라이탄의 말에 리푸노스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되나?"
  그렇게 말한 리푸노스가 라이탄을 쳐다보았다.
  저 드래곤은 자신을 어느 정도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책으로만 봐온 드래곤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자심들의 강함을 인정했다. 그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라타파칸도 그것이 마음에 든 듯했다. 그렇다 해도 눈앞의 해츨링은 제압해야 했다.
  "그레비트!"
  쿵!
  "컥!"
  가중력 마법에 라이탄이 신음을 토하며 넘어졌다. 그러자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라이탄의 팔에 마나봉인 팔찌를 채웠다.
  "큭!"
  결국 해츨링 여덟은 모두 잡히고 말았다.
  해츨링들이 모두 한쪽으로 모였다. 모였다기 보다는 기사들이 옮긴 것이지만...
  그 모습을 보며 아프타가 말했다.
  "저들을 어떻게 하지?"
  마칸이 대답했다.
  "제국 황성으로 데려가는게 어떨까?"
  리푸노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죽고 싶어 환장했어?"
  그러자 마칸이 말했다.
  "저 녀석들을 앞세워 뭔가를 요구하는 거야. 예를 들어, 저들의 부모에게 제국의 수호용이 되어달라든가."
  해츨링 한 명을 공격한 것도 살아남지 못할 짓이거늘 만약 해츨링을 데리고 협상까지 한다면 리샨 대륙의 모든 인간들은 몰살일 것이다. 모든 종족들이 드래곤들의 명을 받아 '인간 사냥'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엄청 위험한 생각을 하는 그들을 보며 아나로가 말했다.
  "치졸하게 애들을 가지고 협살을 하는 게 어디 있어?"
  해츨링들의 상처를 돌봐주던 아나로의 말에 모두가 헛기침을 했다. 다섯 중에 가장 선하고 순수한 아나로였다. 그리고 은연 중에 가장 발언권이 강하기도 한 그녀였다. 화나면 무서운 타입이랄까?
  그런 그녀의 말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해츨링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 모두가 모여서 고심했다.
  그중에는 여자 해츨링들에게 진득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정말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도대체가 어떻게 드래곤을 안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예였다. 그러나 아나로의 날카로운 눈빛에 모두가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런 아나로를 보며 해츨링들도 그녀 곁이라면 왠지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몇 백 년을 살았어도 사고는 어린 아이였다. 그것이 해츨링들의 특징이었다. 아나로가 호감 가는 성격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리폰 제국인들이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밤이 흘렀다.
  해츨링들은 감금 된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제 아무리 안전하다고 한들 적진 안이다. 그것도 에랴나니스를 잡으로 왔다는... 마음 편안하게 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아나로는 이미 자신의 텐트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 그녀가 남긴 말은 아직도 해츨링들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잡아서 미안해…….'
  그 생각이 들자 리얀이 말했다.
  "좋은 사람 같지?"
  라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사람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했어."
  정말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해츨링들이었다.
  "쳇! 아나로 그 여자는 너무 깐깐해."
  그렇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그들이 감금되어 있는 텐트 밖에서 웬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맞아, 라타파칸 님이 있는 이상 리샨 대륙은 천하무적이야! 드래곤들 따위가 라타파칸 님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하잖아?"
  개념상실 말기환자들의 대화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본 라타파칸의 능력은 그야말로 신과 같았다.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기사 둘과 마법사 한 명이 들어왔다. 기운으로 보아 5서클 마스터의 마법사와 소드마스터의 기사들 같았다. 그들은 음흉한 눈으로 리얀 등 여자애들을 쳐다보았다.
  "캬~ 아무리 봐도 아름다운 외모로군."
  "멀리서 보았던 황녀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큭큭큭, 다른 녀석들도 바보군. 그냥 안으면 될 것을 왜 눈치를 보는지."
  그들의 대화에 여덟 명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지금 저 인간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특히 여자애들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저것들이 자신들을 안을 생각을 했단 말인가?
  "지랄하고 앉았네!"
  어느새 에이라나의 말투를 흡수한 레니스가 소리쳤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세 명의 인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세에도 마법사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마법도 못 쓰는 드래곤 따윈 두렵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사일런스 마법으로 소리가 세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마법사였다. 그리고 곧 음흉한 시선으로 리얀, 로리나스, 랸을 쳐다보았다.
  다른 두 명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저 골드 녀석을 가지겠어."
  기사가 로리나스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기사는 랸을 보며 말했다.
  "난 저기 그린드래곤 해츨링."
  "흐흐... 그럼 난 여기 블랙족인가?"
  자신들끼리 마음대로 먹을 것을 나누는 행동에 해츨링들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드래곤을 안을 생각을 하려면 얼마나 개념을 상실해야 할까?
  레니스가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그건 다른 해츨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기사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이봐, 남자 녀석들의 입을 봉하라구!"
  그러자 마법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남자 해츨링들에게 사일런스 마법을 걸려고 했다.
  "이런 제길!"
  그것을 보고 레니스가 말했다. 그때였다.
  "아니지. 거기선 이런 엿 같은 새끼들을 만났을 때는 '개좆같다' 아님 '씨발'이란 단어가 어울릴걸? '제길'은 너무 약해."
  여기서 절대 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 껄쭉한 말투. 해츨링들은 '설마'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두가 놀란 나머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투박한 롱 소드를 늘어트린 아름다운 소녀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이들.
  그때 리얀이 소리쳤다.
  "에, 에이라나!"
  "안녕, 누나? 이틀만이네?"
  '누나'라는 말은 절대 어울리지 않지만 너무 놀란 나머지 그것을 정정해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법사가 당황하며 말했다.
  "네, 네년은 누구냐!"
  그러자 에이라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 여기 돌아다니면서 정보 좀 모았지. 미친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온 것도 모자라 감히 엄마를 죽이겠다? 아주 돌았구만?"
  에이라나는 특유의 껄쭉한 입담으로 아직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셋에게 말했다.
  "네놈들이 죽이러 들어왔다고 말한 드래곤이 내 엄마다. 즉, 난 에랴나니스의 딸이란 소리다!"
  그러자 상황판단이 되었는지 그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별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해츨링?"
  "이들을 구하러 온 것이가?"
  기사들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법사가 말했다.
  "해츨링 여덟이 모두 잡혔는데 혼자서 이 녀석들을 구하러 와? 어이가 없구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마법사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이봐, 드래곤은 마법을 빼면 무섭지 않다고?"
  그러자 마법사가 말했다.
  "솔직히 드래곤들의 진정한 마법실력은 모르겠지만, 10서클 마법을 사용할리 없잖아? 난 봤다, 산조차 날려버리는 라푸노스 님의 마법을! 그 이상의 힘을 쓴다면 아마 그 존재는 신일 것이다! 9서클 마법조차 그만한 힘을 쓴다! 10서클은 전설일뿐!"
  이 마법사 역시 이상한 사상에 찌들어 사는 것 같았다.
  마법사가 말했다.
  "드래곤의 10서클 마법이나 산을 날린다는 것은 전설일 뿐! 지금 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분은 바로 라푸노스 님과 라타파칸 님이시다!"
  '차라리 라푸노스, 라타파칸 신흥 종교를 만들지 그러냐?'
  에이라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지 않지."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가 눈을 번뜩였다.
  "잘 봐둬라. 드래곤이 갖는 위력은 마법뿐만이 아니야!"
  마법사가 비웃었다.
  "그럼 뭐란 말인가?"
  에이라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다른 드래곤들은 어떨지 몰라도."
  슥!
  에이라나가 검을 휘둘었다.
  "난 무공이라는 것이 있다."
  털썩!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마법사가 의아해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헉! 허어어 으아아아아아악!"
  그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자각하는 순간 왼쪽 어깻죽지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떨어져 나간 왼팔을 보고는 절규하며 쓰러져 몸을 뒤틀고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에이라나가 마법사의 왼팔을 날려버린 것이다.
  경악하며 기사들이 검을 빼들었다. 둘다 소드마스터에 이른 강한 검사들이었다.
  그들이 말했다.
  "네 이놈! 어떤 마법을 쓴 거냐!"
  그러자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검을 휘둘렀을 뿐이야."
  그러자 기사가 말했다.
  "웃기지 마라! 어떻게 검이 그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이냐!"
  그 기사에 말에 에이라나는 냉소하며 말했다.
  "너희 같이 검만 휘둘러 검강을 사용하며 장난밖에 못 치는 쓰레기 검사들이라면 꿈도 못 꿀 공격이지."
  에이라나의 말은 기사에게 있어 엄청난 모욕이었다.
  "이, 이놈!"
  에이라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단순히 휘두르는 걸 검술이라고 이름 붙이는 너희들의 그 개념 없는 머리통을 갈라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엄청난 모욕에 기사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들은 에이라나가 해츨링이라는 것도 잊고 달려들었다.
  "이익!"
  "죽어라!"
  하지만 에이라나는 섬뜩하게 웃을 뿐이었다.
  촥! 촤자자작!
  "끄아아아아아악!"
  "크악!"
  그들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에이라나는 마교 특유의 잔인함이 묻은 검로를 마음껏 휘둘렀다.
  마교가 중원에서 공적이 되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강하고 마교에 대한 충성심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포였다. 그들은 상대를 죽여도 쉽게 죽이지 않았다. 좀 더 적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잔인하게 죽였다. 특히 교주의 무공은 그 정도가 심했다.
  에이라나는 그들의 살 하나하나를 헤집었고 기사들과 마법사는 에이라나의 검이 자신들의 살에 파고들 때마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절규했다.
   *   *   *
  그것은 완전한 지옥도였다.
  여덟의 해츨링들은 사람들의 살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내는 에이라나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섬뜩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름답기도 했다.
  그렇게 피 튀기게 검을 휘둘렀으면서도 피 한 방울 안 묻은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물었다.
  "괜찮아?"
  에이라나의 말에 리얀이 대답했다.
  "어, 으응."
  소드마스터를 저렇게 간단하게 죽이다니... 놀란 눈으로 에이라나를 쳐다보는 해츨링들이었다.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그들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씁! 이 수갑은 뭐야?"
  에이라나가 리얀의 수갑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리얀이 말했다.
  "미스릴로 만든 거야. 그것도 순도가 높은 오러 블레이드나 7서클급 절삭마법이 아니라면..."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헤~ 검강? 좋아, 그렇다면."
  에이라나가 검강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흠칫!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낀 에이라나가 갑자기 날아오는 엄청난 기운을 느끼며 그곳으로 검을 내질렀다.
  쾅!
  "에, 에이라나!"
  "허억!"
  "이, 이봐!"
  갑작스러운 폭음에 모두가 놀라서 소리쳤다. 폭음에 텐트가 날아가 버렸다. 엄청난 바람에 여덟 해츨링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엄청난 마나가 느껴졌던 곳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라타파칸이 검을 잡고 있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들었나?"
  라타파칸은 에이라나의 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한 흔적까지 느껴지자 의아해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소드마스터의 기운 둘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잘 숙련된 검사의 감각은 마법사의 마나의 파동을 느끼는 것 보다 더 민감했던 것이다.
  그런 라타파칸의 귀로 기사들의 비명이 들린 것이었다. 그리고 텐트가 있던 자리에는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긴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이 자식!"
  검풍에 에이라나가 날아가 버린 듯하자 레니스가 발광하며 소리쳤다.
  "이 죽일 새끼! 감히 누굴!"
  레니스가 계속 소리 지르고 있을 때.
  "갈!"
  갑자기 들린 엄청난 목소리에 모두가 놀라 귀를 꽉 막았다.
  '마법인가?'
  하지만 라타파칸은 그 상태가 달랐다.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나가 몸을 압박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쿨럭!"
  마나가 역류하면서 피를 토하는 게 아닌가? 이에 모두가 놀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헤~ 날 그렇게 걱정했어?"
  날아가버린 줄 알았던 에이라나가 멀쩡한 얼굴로 레니스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것이다. 라타파칸의 오러 블레이드 다발에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다니!
  하지만 레니스는 다른 이유에서 심장이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아까부터 눈앞에 얼굴을 들이민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라나는 레니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자 의아해했다.
  "헤, 싸가지 없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귀엽잖아?"
  레니스는 에이라나보다 한 살 적어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귀여움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에이라나가 슬쩍 레니스의 볼을 찔러보았다. 그러자 레니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 하지 마!"
  에이라나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하고 싶어도..."
  챙!
  그렇게 말끝을 흘린 에이라나가 자신을 찔러오는 검을 막았다. 그리고 검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라타파칸의 검이 자석에 붙은 듯 에이라나 쪽으로 슥 밀려오는 게 아닌가?
  그것에 검을 내질렀던 라타파칸은 몹시 당황했다.
  바로 절착기술 이었던 것이다.
  에이라나는 생긋 웃으며 라타파칸의 얼굴에 주먹을 작렬했다.
  퍽!
  쿠당!
  이에 라타파칸이 날아가 버렸다.
  "큭! 주먹을 사용하다니!"
  라타파칸이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라나는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그게 어때서?"
  그러자 라타파칸이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검사끼리 주먹을 사용하다니 말이나 되는가!"
  에이라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난 검사가 아닌데? 그리고 멍청하게 검 간의 대결에서 검만 사용하는 미친놈이 어딨어? 까딱 잘못했다가 상대가 품고 있는 암기에 목 찔리면 말짱 꽝인데 말야."
  에이라나는 검사가 아니다. 무인이다. 그런 에이라나는 온몸이 무기인 것이었다. 에이라나의 말에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성한 기사 간의 대결에서 그런 치졸한 짓을 쓰는 자가 어디 있는가!"
  "맞다!"
  기사들의 비난에 에이라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랄하고 앉았네. 전투에서 신성한 게 어딨어? 이기면 그만이야. 강지존! 이긴 사람이 곧 법이고 정의다!"
  마교의 철칙이었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때 피를 닦던 라타파칸이 말했다.
  "아까 그 소리로 날 공격해 내상을 입힌 게 너냐?"
  "당연한 걸 왜 묻지?"
  라타파칸이 에이라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넌 해츨링이냐?"
  "맞아."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해츨링이 더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드래곤이 몰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타파칸의 질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넌 마법사냐, 검사냐?"
  그러자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해츨링이다. 그런데 그런 해츨링을 보며 마법사인지 검사인지 묻다니? 당연히 마법사이지 않는가? 하지만 에이라나의 대답에 모두가 놀랬다.
  "난 마법사는 아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고 검사도 아니지."
  "그렇다면 너는 뭔가?"
  라타파칸이 물었다.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무인이다! 이전에는 순수하게 무를 숭상하던 마교의 소교주였지만 지금은 아니지."
  에이라나의 말에 라타파칸이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에이라나가 피식 웃었다.
  "뭐, 쉽게 말하면 검사라고 보면 되겠지."
  그러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런가?"
  라타파칸이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의외로군."
  드래곤이 스스로를 검사라고 칭하다니! 하지만 에이라나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가 의외라는 거지? 이렇게 보여도 마법보다 검이 뛰어나다고."
  에이라나의 말에 라타파칸이 에이라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에게 1:1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1:1 결투! 그것은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이 아닌가? 라타파칸은 에이라나를 검사로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놀랄 수 밖에.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에이라나는 의아할 뿐이었다.
  "결투?"
  '비무랑 비슷한 것이었나?'
  잠시 생각하던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 좋아."
  그렇게 에이라나가 승낙하자 라타파칸이 자세를 잡았다. 에이라나도 자세를 잡았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피어 올렸다. 그러자 침을 삼키며 모두가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라타파칸이었다. 그는 에이라나에게로 돌진하기 시작하더니 검을 내질렀다. 이에 에이라나가 슬쩍 몸을 돌려 피했다. 그러고는 라타파칸의 허리에 검을 내질렀다. 너무도 깔끔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이라나의 검을 방향을 튼 라타파칸의 검에 의해 막혔다.
  챙!
  둘은 잠시 힘겨루기를 했다. 에이라나가 슬쩍 검을 쳐내고 물러섰다. 너무도 깔끔한 동작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라타파칸도 은근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군."
  그 말에 에이라나가 생긋 웃었다.
  "칭찬 고마워."
  이번에는 에이라나가 움직였다. 그렇게 일자로 돌진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가면 라타파칸의 검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예측한 대로 라타파칸의 검의 사정거리에 에이라나가 들어왔다. 라타파칸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날 무시하는 건가?"
  하지만!
  "천마환영보!"
  갑자기 에이라나가 한 쪽 발을 굴렀다. 그러자 에이라나의 모습이 여러 개로 늘어났다. 라타파칸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헉!"
  그렇게 당황할 때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천마폭격!"
  라타파칸이 뒤돌아서며 검을 내질렀다.
  쾅!
  검기도 불어넣지 않은 검끼리 부딪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폭음이었다.
  "크윽!"
  슥!
  에이라나는 반격은 생각지 못했는지 빨리 몸을 회전시켰다. 에이라나의 신영이 360도 회전하며 지상에 착지했다. 라타파칸은 몸을 추스르며 자세를 잡았다. 엄청난 기술이었다.
  에이라나는 슬쩍 목을 쓸었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렸다. 목에 칼에 벤 자국이 조금 나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검이 목을 파고들어 위험했을 것이다.
  에이라나는 자신이 현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공의 양 때문이었다. 사실은 화경과 현경 사이, 즉 이곳의 말로 표현하자면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경지에 있었다. 참 애매한 경지였다.
  하지만 라타파칸은 현경, 즉 그랜드소드마스터였다. 절대로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것을 잊은 에이라나였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보다 위다. 에이라나가 목을 쓸고 검을 땅에 꽂았다.
  마교는 강한 자를 존중한다. 에이라나도 그렇게 자랐고 그렇게 죽어갔다.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행동에 라타파칸이 의아해했다.
   에이라나가 포권 자세를 한 번 취했다. 갑작스러운 에이라나의 행동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처음 보는 자세였지만 에이라나가 라타파칸을 존중해주는 것 같았다.
  에이라나가 다시 검을 잡았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라타파칸이 물었다.
  "방금 그 자세는 뭐지?"
  "별거 아냐. 단지 당신을 존중해준다는 뜻이야."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그 표정에 라타파칸도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당신을 얕본 것을 사과할게. 난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쓰러트리겠어."
  에이라나의 기세가 바뀌었다. 방금 전에도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더욱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라타파칸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거 영광이군."
  에이라나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라타파칸도 마나를 끌어올렸다(리샨 대륙은 기를 마나라고 부느니 이렇게 표현하겠다, 둘다 같은 거다.) 그러자 맺히는 검강.
  "오러 블레이드!"
  "이럴 수가! 저 해츨링, 소드마스터 최상급이었단 말인가!"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라타파칸의 검강이 훨씬 컸다. 그래서 모두가 라타파칸이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에이라나의 검강이 작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작아진 검강은 검만 두를 정도가 되었다. 그것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저렇게 작은 오러 블레이드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소드마스터급의 검사들과 마법사들은 모두가 경악했다.
  "이럴 수가! 오러 블레이드를 압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해츨링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인간의 혈자리를 모두 알고 내공을 자유롭게 응용할 수 있는 중원의 고수들은 이런 게 가능했다.
  검이 길면 사정거리야 길어지겠지만 그만큼 내공 소모가 심했다. 차라리 크게 압축하는 게 훨씬 내공을 아낄 수 있었다. 처음에야 내공이 많이 들겠지만 훨씬 강도가 강하고 잘 깨어지지 않으니 절정고수들은 검강 압축법을 잘 사용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한 방 싸움이다."
  라타파칸도 고개를 끄덕이고 마나를 끌어 모았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뛰었다.
  "검풍!"
  라타파칸이 검풍을 사용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쾅!
  엄청난 폭음이 들여왔다. 하지만!
  "천마쾌보!"
  속도에 중점을 둔 천마쾌보. 그러자 엄청난 속도로 라타파칸의 검풍을 피하는 에이라나였다.
  다음에는 에이라나 차례였다. 라타파칸이 에이라나의 공격을 피하면 다시 원점!
  "천마일백환검!"
  파바바바밧!
  "헉!"
  갑자기 100개의 환검이 나타나 라타파칸을 압박했다. 모두가 경악했다. 한 사람이 100개의 환검을 만들어 내다니!
  라타파칸이 내공으로 뭉쳐있는 환검 하나하나를 쳐냈다.
  푹!푹!푹!푹!
  곧 살을 꿰둟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라나가 심장을 꿰뚫은 검을 회수했다. 마지막에 라타파칸이 에이라나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내 생전 본 것 중 최고의 검술이었다."
  쿵!
  그리고 쓰러졌다. 그런 라타파칸을 보며 에이라나가 다시 포권 자세를 취한 다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영환휘를 만들어내더니 기사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감히 겁도 없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라타파칸의 패배로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던 기사들이 에이라나의 검술에 맞아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에이라나는 기를 느끼며 강한 자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전에 해츨링들이 위험할까봐 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모두들 멍하니 에이라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개중에는 마나를 회복했는지 에이라나를 돕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죽어 나가던 기사들도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에이라나는 라타파칸의 대결에서 힘을 많이 썻기에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찌푸리던 에이라나가 멈칫했다.
  에이라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외쳤다.
  "할아버지!"
  에이라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타난 엘란카넌이 말했다.
  "에이라나! 이곳에서 뭘... 응? 네놈들은 뭐냐!"
  생각보다 입을 오래 비울 것 같아서 에이라나를 엘란카넌에게 부탁한 에랴나니스였다.
  그런데 에랴나니스의 레어에 도착해 보니 에이라나가 없어 기척을 찾던 엘란카넌이었다.
  그런데 에랴나니스의 영역 끝자락에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지체 없이 달려온 엘란카넌은 보았다. 피를 뒤집어 쓴 에이라나를 말이다. 아무리 에이라나가 깔끔하게 처리한다 해도 지친 상태였기에 피가 묻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황하며 물을 때 그의 눈에 인간들이 보였다. 그리고 해츨링들까지.
  그러면 인간들이 해츨링들을 공격?!
  "네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화르르르르르륵!
  쾅!
  "크아아아아악!"
  "끄악!"
  "커억!"
  엘란카넌이 헬파이어 하나를 만들어 날렸다. 그러자 바로 지옥의 불꽃이 현신하여 모든 것을 태우기 시작했다.
  "엡솔루트 실드!"
  실드 마법을 사용한 넷만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나로는 탈진해 쓰러졌다. 리푸노스도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안중에 없다는 듯 엘란카넌이 말했다.
  "에이라나, 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냐!"
  "마나의 파동이 느껴져서 내려와 봤더니, 저 인간들과 얘들이 싸우고 있었어요."
  에이라나의 말에 엘란카넌이 해츨링들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냐?"
  "그, 그게..."
  라이탄이 당황했다. 뭐라 말해야 하는가?
  "가출인가?"
  "헉!"
  엘란카넌이 날카로운 눈으로 묻자 헛바람을 들이키는 라이탄.
  그러자 엘란카넌이 냉소하며 말했다.
  "오호라~ 너희들이 개념 없이 가출했는데 내 손녀가 싸움에 휘말렸다 그거냐?"
  엘란카넌이 분노하며 말했다. 그러자 당황하는 해츨링들. 그런 해츨링들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할아버지, 그것보다 저 피곤해요. 레어로 가요."
  그러자 엘란카넌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손녀, 피곤한가 보구나? 그럼 일단 레어로 가자꾸나."
  에이라나 덕분에 여덟 해츨링이 살았다. 에이라나가 그들의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뭐, 지옥의 맛을 조금 연장시켜줬을 뿐이지만 말이다.
  "너희들, 자세한 이야기는 레어에 돌아가서 묻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한 엘란카넌이 다 같이 워프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아나로를 돌바주던 리얀의 손에 아나로가 잡혀있어 아나로도 같이 워프되었다.
    엘프 마을
  여덟 해츨링들의 가출 사건 이후 30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렀다. 에이라나는 아직도 소드마스터 최상급의 경지에서 헤매고 있었다. 도대체 현경의 경지로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무인들과 비무를 하며 감각을 성장시켰겠지만, 지금은 독학으로 하고 있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폐관수련을 하는 것도 안 될 듯 싶었다. 현경은 오르기 힘든 경지다. 마교의 교주조차 현경에 오르기 힘드니 말이다.
  그리고 드래곤이 아무리 마법에 능하다고 해도 마법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마법과 무공의 깨달음이 충동을 일으킨 달까? 둘 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같지만 그 깨달음의 내용이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 그 두 개가 헷갈리는 것이다.
  에이라나가 명상을 하다가 눈을 떴다. 한 붉은 머리 청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 왔어?"
  너무 명상에 몰두했던 것일까? 레니스가 온 것을 못 알아본 것이다. 그 옆에는 리얀과 로리나스도 있었다.
  "에이라나, 안녕?"
  로리나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라나도 인사했다.
  "안녕, 로리나스."
  리얀도 생긋 웃으며 에이라나에게 헤드락을 걸며 말했다.
  "이 언니는 보이지 않니?"
  "하하하. 안녕, 언니."
  언니라는 말에 에이라나의 얼굴이 상당히 구겨져 있었다. 사실 가출 사건 이후 여덟 명은 죽도록 맞았다. 에이라나는 옆에서 '남의 괴로움은 자신의 즐거움'이라는 듯 그들의 구타를 보며 킬킬거리고 있었고 말이다.
  확실히 싸움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는 것이라도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여덟 명과 에이라나는 상당히 친해졌다. 그들이 에이라나가 위험할 때 구해줬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리얀 옆에는 아나로가 있었다. 아나로는 우연치 않게 같이 워프되었다. 그때 리얀이 자신의 가디언으로 쓸 것이라고 자신의 부모에게 부탁해 리얀의 가디언이 되어 있었다.
  물론 늙지는 않았지만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리얀의 부모가 영생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침울한 리얀이었다. 하지만 아나로는 그저 방긋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나로, 오랜만이에요."
  에이라나가 아나로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30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어 존대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해츨링들은 그런 에이라나를 이해 못했지만 말이다.
  아나로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로군요, 에이라나."
  그렇게 인사하고 있을 때,
  "뭐야? 난 안 보여?"
  레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이라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참을성 없기는."
  그러자 도끼눈을 뜨는 레니스였다.
  "뭐얏?"
  하지만 그런 레니스의 눈빛을 무시하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왜 왔어?"
  에이라나의 물음에 리얀이 말했다.
  "놀러 가자."
  "대답은 '싫어'다!"
  "뭐야? 왜?"
  리얀이 실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라나는 늘 하던 말로 대꾸 했다.
  "왜긴 왜야? 현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못 올라가고 있다고!"
  그러자 아나로가 말했다.
  "뭐가 안 되나요?"
  아나로의 물음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네, 좀 강한 상대랑 한 번만 붙으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이 세계에서 에이라나가 싸운 상대라고는 몬스터들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검사와 붙는다면 감이 잡힐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자와 붙은 건 30년 전 라타파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영 감을 잡지 못하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지금도 성룡이랑 맞먹을 만큼 강하면서 더 강해지겠다고?"
  에이라나는 레니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왜? 뭐가 어때서?"
  에이라나가 그랜드소드마스터를 제압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여덟의 해츨링과 아나로밖에 몰랐다.
  그것을 아는 이들은 이미 다 죽었다.
  리폰 제국은 당연히 멸망했다.
  해츨링들이 아무리 가출했다고 하더라도 해츨링들인 줄 알면서도 공격한 리폰 제국은 절대 가만 둘 수 없다며 리폰 제국의 황성으로 워프한 해츨링들의 부모들...
  하지만 이미 그곳은 에랴나니스와 카랴만에 의해 초토화 직전이었다. 특히 황족들은 에랴나니스에 의해 잔인하게 고문까지 당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을 죽이겠다고 기어들어온 것들을 절대 가만 두지 못하겠다고 발광한 에랴나니스였다.
  그렇게 리폰 제국의 귀족들이란 귀족들은 씨가 말라버렸다.
  개념 없는 황제를 둔 리폰 제국. 1,000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제국이 단번에 망해버리고 말았다.
  아무튼 에이라나는 다음 경지로 넘어가야 한다는 고민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오들도 에이라나와 놀지 못한 리얀은 불만이 쌓일 뿐이었다.
  레니스도 한숨을 쉬며 잘 있으란 말과 함께 레어 안에 있는 워프 게이트에서 마나를 활성해 워프를 해서 돌아갔다. 리얀과 로리나스도 마찬가지였다.
  에이라나만이 혼자서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레랴나스가 오랜만에 자신의 손녀를 보러 딸의 레어로 워프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녀를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있는 것이라고는 레어 한가운데에서 퍼질러서 낮잠을 자는 딸밖에 없었다.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에랴나니스를 보며 레랴나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에잉~ 이런 년이 뭐가 좋아서 사위는 결혼까지 했을까? 쯧쯧쯧. 이 녀석의 배에서 어떻게 그렇게 귀여운 애가 났을꼬?"
  이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레랴나스였다.
  어딜 내놔도 반듯할 것 같은 사위가 왜 자신의 딸과 결혼했을까? 물론 자신이야 좋긴 하지만 말이다.
  카랴만의 성격이 좀 더럽다는 말도 나돌고 있었다. 그러니 잘 맞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완벽하게 미스테리인 것은 저런 딸에게서 에이라나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정말 놀라울 뿐이었다.
  "혹시 어디서 주워온 알이 아닐까?"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딸을 보며 혀를 차던 레랴나스가 에이라나를 찾아 나섰다.
  에이라나가 엘란카넌의 레어에는 가본 적은 있어도 자신의 레어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레어를 구경시켜 줄 겸 자신의 레어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레어의 멀리서 명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레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어 안에서 에이라나를 찾던 레랴나스는 에이라나가 보이지 앉자 슬쩍 얼굴을 찌푸리며 퍼질러 자고 있는 에랴나니스에게 물었다.
  "에랴나니스, 에이라나 어디 갔니?"
  그러나 에랴나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퍽!
  "켁!"
  에랴나니스의 머리를 가격하는 레랴나스였다. 일어나서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랴나니스가 물었다.
  "엄마 언제 왔어요?"
  아직도 잠의 마력에서 허우적거리는 에랴나니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혀를 찬 레랴나스가 말했다.
  "에이라나 어디 있니?"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하암~ 레어 앞마당에서 또 마법을 난사하며 앞마당을 초토화 시키고 있겠죠. 하암~ 졸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버리는 에랴나니스였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도끼눈을 뜬 레랴나스였지만 에이라나를 찾으러 레어 앞마당으로 향했다. 하지만 당연히 없었다.
  레랴나스가 다시 레어로 돌아와 에랴나니스에게 말했다.
  "앞마당에도 없구나."
  그러자 아직 잠이 덜 든(?)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보물고나 무기고에 있겠죠."
  그리고 다시 자는 에랴나니스였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레랴나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무기고와 보물고를 뒤졌다. 역시 없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서재에도 가봤다. 그런데도 없다.
  다시 돌아온 레랴나스가 말했다.
  "보물고나 무기고에도 없다."
  "그럼 서재에 있겠죠. 저 잘래요."
  빠직!
  "서재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 간 거니?!"
  레랴나스의 인내심이 한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내심을 끝내버리는 결정적인 한 마디!
  "몰라요~"
  "파이어 버스터!"
  쾅!
  "꺄울~"
  "파이어 익스플로젼!"
  쾅! 콰가가가가가강!
  "꺅!"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열 받은 레랴나스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   *   *
  레어 안이 초토화되었다.
  "우에~ 내 레어 또 초토화됐잖아!"
  초토화된 자신의 레어를 보며 오열(?)하는 에랴나니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레랴나스가 에랴나니스의 뒤통수를 쳤다.
  퍽!
  "켁!"
  "이년아! 네가 그러고도 에이라나의 어미냐?"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랴나니스를 쳐다보는 레랴나스.
  그런 레랴나스를 보고 움찔하며 시선을 돌리는 에랴나니스였다.
  레랴나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찾는 손녀는 없고 이런 것만 있으니... 에이라나는 어디 간 거지?"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투덜거렸다.
  "어이구 '이런 것'이라 죄송하네요. 에이라나는 아마도 숲속에 몬스터 잡으러 갔을 거예요."
  에랴나니스의 말에 레랴나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몬스터는 왜?"
  "심심한 모양이죠. 그래도 그 덕분에 위험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길러질 것이고, 마법 응용능력도 늘 것 같아서 놔두고 있어요."
  아니, 에이라나는 무조건 검으로 때려잡는데... 그리고 지금 명상하러 들어갔는데...
  에랴나니스의 말을 듣고 레랴나스가 말했다.
  "그래? 할 수 없군."
  그런 레랴나스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물었다.
  "에이라나는 왜요?"
  "내 레어 구경시켜 주려고. 네 영역에만 있으면 답답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내 레어에는 온천도 있잖아?"
  "아~ 온첨! 데려가면 좋아할지도 모르겠네요."
  레랴나스의 레어는 사화산이었다. 그리고 레드 일족의 수장답게 엄청나게 큰 영역을 가지고 있엇다. 사화산 중앙이 레랴나스의 레어인데 그곳에는 온천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온천.
  레어 안은 고급 온천 여관처럼 여기저기 꾸며져 있었다.
  레랴나스의 온천은 몸에도 좋았다. 그래서 레랴나스도 자주 온천에 들어갔다. 에랴나니스도 가끔씩 온천 때문에 레랴나스의 레어에 온천에 가곤 했다. 물론 에이라나도 온천을 좋아할 것 이다. 아주 많이.
  아쉬워하는 레랴나스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엄마, 에이라나가 들어오면 한번 물어볼게요."
  "그래줄래? 흐음~ 아쉽다."
  그렇게 말하고 워프하며 사라지는 레랴나스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베~ 말해주나 봐라!"
  절대 말 안 해줄 생각인 에랴나니스였다.
  "겨우 그딴 이유로 레어를 초토화시켜? 엄마는 고룡도 아니야."
  유치하게 레랴나스를 씹는 에랴나니스. 레어를 초토화 시킨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아 보였다. 하긴, 레랴나스는 에랴나니스의 엄마다.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계속 레랴나스를 씹는 에랴나니스.
  하.지.만! 
  휘익!
  퍽!
  "컥!"
  갑자기 조약돌 하나가 날아오면서 에랴나니스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러자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는 에랴나니스. 그런 에랴나니스 뒤로 레랴나스가 나타났다.
  뒤통수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는 에랴나니스를 보며 레랴나스가 차갑게 말했다.
  "내가 간 줄 알았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생각하는 꼬라지 하고는. 유치하게 말 안 하면 넌 제삿날이다."
  그렇게 말하고 사라지는 레랴나스.
   진짜 누가 유치한 건지.
  아무튼 유치하고도 유치한 모녀였다.
  에이라나가 명상을 끝내고 레어로 돌아왔다. 하지만 레어 안을 보며 멍해지는 에이라나였다.
  "뭐, 뭐야? 레어가 완전히 걸레가 됐잖아?"
  엄마의 레어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에이라나가 보기에는 너덜너덜해진 걸레 같았다.
  그리고 레어 가운데에는 오열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어, 엄마! 무슨 일 있었어?"
  에이라나가 당황하며 에랴나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머리를 부여잡고 쭈그려 앉아 울고 있던 에랴나니스가 에이라나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에이라나야~ 흑흑흑, 네 할머니 너무 무서워. 내가 잠을 자서 대답을 좀 안 했는데 겨우 그거 가지고... 흑흑흑, 글쎼 갑자기 마법을 사용하면서 이 엄마를 패는 거 있지? 으허어어어엉! 네 할머니 너무 난폭해!"
  에랴나니스와 레랴나스 둘 다 성격이 똑같다. 어디서 자신과 같은 성격을 가진 드래곤을 씹을 수 있을까? 정말 뻔뻔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무튼 에이라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 내가 보기에는 엄마는 그것보다 심하면 심했지만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
  심히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할머니 오셨다 가셨어?"
  에이라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랴나니스였다.
  "아, 할머니 왜 왔냐고?"
  언제 울었냐는 듯 에랴나니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보고 할머니 레어에 놀러오라고 하고 가셨다."
  에이라나가 되물었다.
  "할머니 레어에?"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랴나니스.
  "응. 네 할머니 레어는 내 레어보다 훨씬 크고, 온천도 있거든."
  그러자 에이라나가 눈을 크게 떴다.
  "온천이요?"
  "그래 온천이 있지."
  그러자 에이라나가 소리쳤다.
  "나 갈래!"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딜?"
  에이라나가 외쳤다.
  "할머니 레어!"
  에이라나의 말에 에랴나니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서 뭐하게? 내 레어보다 크다는 것 빼고 다를 것도 없어."
  "온천이 있잖아."
  "잉? 겨우 온천 따위의 유혹에 넘어가다니!"
  에랴나니스, 레랴나스에게 쌓인 것이 많나 보다. 에랴나니스의 말을 무시하며 에이라나가 생각했다.
  '온천은 몸에 좋다고 하던데, 가서 몸이나 풀어야지!'
  가서 현경으로 넘어가지 못하며 쌓인 스트레스도 좀 풀 생각인 에이라나였다. 그러고 보니 에이라나는 온천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교에서는 죽어라 수련만 했으니 말이다.
  온천에 대한 기대가 큰 에이라나가 눈을 반짝이며 워프 게이트로 달려갔다.
  "잠깐!"
  그때 에랴나니스가 에이라나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러자 의아해하는 에이라나.
  "응? 왜?"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나도 갈래."
  그러자 에이라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같이 가면 되지 왜 잡아?"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이거 치우고 가자."
  "에엑!"
  혼자서 치우기 힘드니깐 아직 어린 딸의 손이라도 빌리자는 에랴나니스였다. 에이라나가 항의했다.
  "엄마가 치워! 엄마랑 할머니가 싸우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
  스윽.
  에이라나의 항의에 에랴나니스가 활짝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어머니, 어디부터 치울까요?"
  그러자 바로 태도 돌변하는 에이라나.
  "응~ 딸아, 넌 저기 치우렴."
  "예."
  에이라나 참 불쌍하다. 아무튼 그 엄마에 그 딸 같았다.
  *   *   *
  레어를 정리하는데 3일이나 걸렸다. 드래곤의 힘으로 3일 걸렸다면 엄청나게 초토화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끄, 끝났다."
  에이라나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3일 동안 죽어라 노동력 착취를 당한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자~ 이제 옷 갈아입고 할머니 집으로 가자."
  옷은 먼지 범벅이었다. 에이라나는 자신의 옷을 보더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기 중원식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나온 에이라나였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것이 편한 듯 보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에랴나니스가 물었다.
  "그게 편해? 난 치렁치렁해서 조금 불편하던데."
  분명 바람이 잘 통해서 편하기는 했지만 활발한 에랴나니스에게는 별로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입은 에이라나가 의아했다. 그래도 예쁘기는 했다.
  에랴나니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라나였다.
  "편하니깐 입지."
  "뭐, 네가 편하다면 할 수 없고. 그리고 예쁘니깐 됐지 뭐."
  그렇게 말한 에랴나니스가 워프 게이트에 올라섰다. 에랴나니스를 따라 에이라나도 워프 게이트에 올라섰다.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딱!
  그리고 활기차게 말했다.
  "자~ 할머니 레어로~ 렛츠 고~ 워프!"
  그 말과 함께 워프 게이트가 빛을 뿜었다.
  파앗!
  그리고 그 빛이 모녀를 감싸더니 사라졌다. 레어에는 적막만 흐를 뿐이었다.
  파앗!
  레랴나스는 갑자기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에 자신의 레어에 설치되어 있는 워프 게이트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빛이 퍼져나갔다. 그 빛이 사라지고 은발에 은안을 가진 자매처럼 보이는 이들이 나타났다.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인과 십대 후반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물론 두 여인은 모녀 관계다. 바로 에랴나니스와 에이라나였다. 레랴나스가 말했다.
  "에이라나, 할머니 레어에 잘 왔다."
  에이라나는 엘란카넌의 레어보다 더 커보이는 레랴나스의 레어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레랴나스의 레어는 드래곤 일족 중 가장 컸다. 바로 레랴나스의 할머니가 물려준 레어가 바로 이곳이었다. 적어도 몇난 년은 되었다는 뜻이었다. 엘란카넌의 레어보다 두 배는 커보이는 레랴나스의 레어에 멍한 표정을 짓는 에이라나였다.
  "크, 크다!"
  에이라나의 멍한 감탄사에 레랴나스가 생긋 웃었다. 엘란카넌의 레어도 에랴나니스의 1.5배는 되었는데...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몇 만 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곳이니 좀 세월의 멋(?)도 나지 않니?"
  에랴나니스의 말에 에이라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만 년?"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는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네 고조할머니의 레어였으니 말이다. 네 고조할머니가 할머니에게 물려준 것이지."
  "와!"
  에이라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랴나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그럼 난 에이라나에게 레어를 물려주면 되겠구나?"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정말요?"
  레랴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었다.
  "그래, 너한테 주마."
  그러자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저번에는 나한테 준다면서요!"
  바로 반발 들어오는 에랴나니스. 그런 에랴나니스를 보며 레랴나스가 귀를 후비며 말했다.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에랴나니스가 발끈 하며 말했다.
  "캭! 벌써 노망났어요?"
  그러자 레랴나스가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뭐랏! 죽고 싶어?!"
  "캭! 먼저 말 바꾼 건 엄마잖아요!"
  그러자 레랴나스 왈!
  "이전에 그런 소리를 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너보다는 에이라나에게 주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에랴나니스가 말했다.
  "고룡이나 됐으면서 한 입으로 두 말해요?"
  "흥! 고룡이라고 꼭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약속의 맹세도 아니고."
  약속의 맹세는 드래곤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약속이었다. 보통 드래곤 하트를 거는데 만약에 그 약속을 어길 시 그 드래곤은 광룡이 되어버린다. 이건 용언으로 맺어져 있는 것이라 드래곤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약속의 맹세를 하지 않았다. 약속을 어긴 드래곤들은 드래곤 사회의 수치로서 모든 드래곤들의 척살대상 1호가 된다.
  광룡 중에서 마계로 소환당해 마족이 되는 드래곤도 있었다. 그러면 그 드래곤은 소환한 마족이 그 드래곤의 주인이 되는데, 보통 마왕 아니면 마공작급의 마족들이 광룡을 소환했다. 드래곤을 원해서 일부러 음모를 꾸며 광룡으로 만들기도 했다.
  특히 드래곤들의 폴리모프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기에 마왕들이 첩으로 들이기도 했다.
  그렇게 따지면 에이라나는 참 위험(?)한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레랴나스의 말에 에랴나니스가 반발했다.
  "캭! 나도 못 참아! 나이 많은 게 뭐가 대수라고!"
  "어쭈? 덤비냐? 그래 덤벼라!"
  쾅!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9클래스 고위급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하는 두 드래곤. 그런 드래곤을 봄 에이라나가 물러섰다. 그 근처에만 가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이라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저 레어 근처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러자 여유가 있는 레랴나스가 말했다.
  "꼭대기에 호수가 있으니 한번 가보렴."
  레랴나스가 여유롭게 말했다.
  에랴나니스는 기를 쓰고 덤볐다. 에이라나는 그것을 보며 식은땀만 흘릴 뿐이었다. 그래, 콩가루 집안이지?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에이라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땀을 삐질 흘렸다.
  자신의 가족은 너무 쾌활(?)한 것 같았다.
  에이라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레어 입구에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에랴나니스의 영역과는 그 차원이 틀렸다.
  레랴나스의 레어는 사화산에 있기 때문에 높은 산에 있었다. 몇 만 년 전 아주 큰 화산이었기 때문에 아주 높았다. 입구도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에이라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높은 산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마교에서 수련할 때 있었던 천마산도 이것보다 높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신 에이라나는 산 정상 쪽은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경공술을 이용해 달려갔다.
  더 높은 곳에서 경치를 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랄까? 그리고 정상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에이라나는 사화산을 타며 올라갔다. 아주 높은 산이었다. 높이로 따지면 백두산 정도? 보통 걸음으로 뛰어간다고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정도의 높이였다.
  다행이라면 레랴나스의 기운과 더운 지역이라는 것 때문에 겨울이라도 눈이 없다는 점?
  에이라나는 경공술을 이용해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빠른 시간 내에 정상에 도착한 에이라나.
  에이라나는 정상 가운데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를 보며 감탄했다. 아주 멋진 경치였던 것이다.
  "와~ 멋지다!"
  에이라나가 순수하게 감탄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멋진 경치는 후생 150년의 세월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며 전생의 24년의 세월 동안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에이라나는 감탄하며 호수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호수 앞에 쭈그려 앉아 호수에 손을 집어 넣어봤다.
  아까 말했듯이 아무리 더운 지역이라도 지금은 겨울이고 레랴나스가 레어를 틀고 있는 사화산은 아주 높은 산이었다. 그렇기에 물이 아주 시원했다.
  레랴나스의 레어는 지하였기 때문에 온천이 있었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실버드래곤인 에이라나다. 차가움에 내성이 강했다.
  물의 차가움을 느끼던 에이라나가 갑자기 물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푸아!"
  에이라나가 얼굴을 빼며 숨을 헐떡였다. 차가움이 온몸으로 퍼지는듯해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 호수에서 수영이나 해볼까?'라고 생각하는 에이라나. 그때 에이라나의 감각에 뭔가 잡혔다. 에이라나의 눈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에이라나는 아무도 없는 호수 근처의 조그마한 수풀 사이에 대고 말했다.
  "이봐, 걸렸어. 나와."
  바로 에이라나의 감각에 기척이 잡힌 것이었다. 크기로 보아선 인간의 기척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곳은 레랴나스의 레어이다.
  이렇게 깊은 곳에 어떻게 인간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한 에이라나였다. 아니, 그것보다 이곳은 인간들에게서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몬스터들이 출몰해서 두세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몬스터들을 만난다는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기척은 움찔할 뿐 나오지 않았다.
  에이라나는 마교에 있을 때부터 기척을 숨기며 자신을 주시하는 이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아직도 그 날카롭게 버려진 습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로 적의부터 표출하는 에이라나였다.
  "안 나와?"
  기척을 숨기며 자신을 주시하는 시건이 기분 좋을 리 없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은빛의 눈동자에서 냉기가 나오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걸렸으면서도 당당하게 숨어 버티고 있는 저 건방진 것을 어떻게 골려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이라나의 눈은 사악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장난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제 에이라나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어 있는 존재를 향해 그 살기가 표출되었다.
  부스럭!
  그리고 그 살기를 받은 존재가 움찔움찔했다.
  결국.
  "꺄아아아아아악!"
  그 존재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비명을 들어보니 여자인 것 같았다.
  그런 그 존재를 보며 '조금 심했나?' 하고 생각하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는 극한의 살기로 숨어 있는 존재에게 환상을 보여주었다. 아마 그녀는 에이라나가 자신을 처절하게 죽여 버리는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전직(?) 마교의 소교주라고...
에이라나는 그런 존재를 보며 조금의 죄책감만 들뿐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감히 자신을 몰래 훔쳐본 녀석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골려줄지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쫓아가려고 하는데.
  "어쭈? 좀 빠르네?"
  그녀가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에이라나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네가 빠르나 내가 빠르나 어디 한번 해보자."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경공술을 밟으며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몰래 자신을 훔쳐본 것을 철저하게 응징해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걸 가지고 열 내는 에이라나도 성격은 참 더러운 편에 속했다.
  "저거 정말 보통으로 뛰는 거 맞아? 뭐가 저렇게 빨라?"
  에이라나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가 저렇게 빠르단 말인가?
  에이라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리다가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뭐야, 저 녀석? 어떻게 숲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그래, 속도로는 자신이 훨씬 빠르다. 그런데 상대는 숲속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숲이 자신의 집인 양 말이다.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마교의 신법 중 숲속에서 추격하기 알맞은 신법 하나를 사용했다.
  령림유연보.
  숲속에서 신속하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신법. 그리고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숲 속에서 상대를 척살할 때 쓰는 신법으로 마교 척살대원들이라면 누구나 익히는 신법이었다. 숲이 아니라도 은밀함 때문에 자주 사용되었다.
  에이라나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신법 특유의 기운 때문에 은밀함과 음침함까지 느껴졌다.
  레리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레랴나스님의 레어 위에 있는 호수에 있는 호수의 정령과 계약을 맺으러 갔다. 그곳의 정령은 최상급의 정령으로 성룡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정령이었다.
  하이엘프인 레리아. 호수의 정령 엘리로리아와 계악을 맺은 그녀였다. 그렇게 마을에서 셋밖에 없는 엘리로리아와의 계약자라는 타이틀을 따 기뻐하던 레리아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은발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정령.
  은안은 꼭 눈의 정령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특유의 향이 인간이었다.
  그래서 의아해서 숨어서 소녀를 쳐다보았다.
  소녀는 호수를 보더니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옷을 입고 있던 그녀는 호수 가까이로 다가가 차가운 호수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얼굴을 담그고 세수를 했다.
  은빛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그것에 감탄한 레리아였다.
  그녀는 이내 이상한 옷을 벗고 호수에 뛰어들 생각인지 옷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멈칫했다.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던 레리아는 의아했다. 하지만 다음 느껴지는 기운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주위로 퍼지더니 그녀가 정확히 자신이 있는 쪽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말했다.
  "이봐, 걸렸어. 나와."
  흠칫!
  숲속에서는 천하의 소드마스터도 자신들을 찾기 힘들었다. 아니, 거의 완벽하게 숲속에 숨을 수 있었다. 그런데 풀숲에 숨은 자신을, 어려보이는 인간 소녀가 찾은 것이었다. 그렇게 흠칫 굳어 있을 때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안 나와?"
  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검을 차고 있는 게 꽤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슬그머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온몸이 굳었다.
  그리고 온몸으로 소름이 쫙 퍼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소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자신의 심장을 검으로 헤집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자신을 찢어발기는 모습까지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레리아는 굳었다. 그리고 자신이 쓰러지고 있을 때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몸은 멀쩡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뜯겨져나간 살이 여기저기 튀어있던 주위도 깨끗했다.
  그녀는 공포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레리아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레리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붙잡히면 죽는다고! 도망치라고!
  레리아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숲속으로 도망쳐서 소녀를 따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을 쫒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그러자 덜컥 심장이 내려 앉는 듯 했다.
  자신보다 더 빨랐다. 다행히 숲에서 자신의 종족보다 빠른 존재는 없기에 거리가 좁혀지지는 않았다.
  레리아는 빨리 통신 아티팩트로 마을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게 도움 요청을 막 끝냈을 때 갑자기 소녀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따라잡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자신보다 숲에 더 익숙한 듯 어마어마한 속도로 자신의 등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에 마음까지 굳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침함까지 드는 가운데 레리아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하지만 거리는 엄청난 속도로 좁혀지고 있을 뿐이었다.
   *   *   *
  령림유연보를 사용해 자신을 몰래 훔쳐본 존재를 추적하던 에이라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레리아는 갑자기 에이라나의 기척이 사라지자 흠칫 굳었다.
  그것에 레리아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이봐."
  "헉!"
  앞에서 웬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니 그곳에서는 소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레리아가 깜짝 놀라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야? 왜 사람을 몰래 훔쳐보고 난리야?"
  그녀의 말에 레리아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궁금 한 게 있었으니...
  "너, 넌 뭐야?"
  아직 150살밖에 되지 않아 18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레리아였다. 그러고 보니 에이라나와 나이도 같았다. 레리아의 물음에 성격 더러운 에이라나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스릉!
  "헉!"
  에이라나가 검을 뽑아 레리아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씁! 몰래 훔쳐본 게 누군데 당당하게 눈을 부라리며 질문을 해? 어쭈? 눈 안 깔아?"
  에이라나의 말에 레리아가 말했다.
  "그, 그렇다고 다짜고짜 살기를 뿌리다니!"
  레리아가 따지듯 말했다.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지만 적의는 없는 것 같았다. 목 언저리에 검이 있으면 차가움이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했다. 그것이 신기했다. 날카로운게 있는데도 소름이 돋지 않는 것이 마치 검에 의지가 있어 날을 세우지 않은 듯 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습관이야. 매일 암살 위험에 시달렸거든."
  그런 그녀를 보며 레리아가 의아해했다. 왠지 눈앞의 소녀가 편안하게 느껴졌다. 방금과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레리아는 에이라나가 어느 나라의 공주쯤 되는 줄 알았다.
  자신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에이라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라나가 물었다.
  "이봐, 내가 무섭지 않아? 아까 극한의 살기도 뿌렸고 목에 검도 들이밀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레리아가 생긋 웃었다. 왜 이 말은 안 하나 했다. 레리아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에이라나의 눈에 다 나와있었다.
  "넌 날 죽이지 않아."
  에이라나가 물었다.
  "어떻게?"
  레리아가 검을 손으로 치우며 말했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에이라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죽일 생각은 없다. 벨 생각도 없다. 그저 장난기가 발동해 쫓은 것이었다. 눈앞의 소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검 날을 잡아 치우다니...
  심검합일이 되어 검에 날이 완전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쇠몽둥이 정도?
  이를 알 리 없는 소녀는 단지 살기와 적의가 없다고 느끼며 아무렇지 않게 검에 날이 없다는 듯 손으로 치웠다.
  "역시 검에 날이 없네? 가검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거야? 아님, 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검?"
  태연하게 묻는 그녀를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린 에이라나가 그녀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베었다.
  슥!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에이라나를 보며 의아해하는 레리아. 하지만 다음에 일어난 일에 레리아는 굳고 말았다.
  스르르르르륵!  쿵!
  갑자기 나무가 잘리더니 커다란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절삭 되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레리아.
  투박해 보이는 롱소드. 그런 롱소드가 가볍게 커다란 나무를 베었다.
  보기와 다르게 날이 날카로운 것인가?
  아까 자신이 손으로 잡았을 때 분명 베이지 않았다.
  도대체...
  에이라나가 히죽 웃었다.
  "가검 아냐."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레리아.
  "도, 도대체..."
  그렇게 그녀가 멍하니 묻자 에이라나가 얼굴을 구겼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의아하게 생각하던 레리아.
  깡!
  에이라나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레리아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화살은 분명 자신의 일족이 만든 것이었다.
  레리아가 말했다.
  "어어... 자, 잠깐!"
  하지만 그녀의 말과 함께 엄청난 수의 화살이 에이라나를 노리고 들어갔다. 레리아는 깜짝 놀라 정령을 불러 에이라나를 방어하려고 했다. 왠지 호감 가는 상대를 죽게 내버려두기 싫었다.
  그러나 눈앞의 소녀는 히죽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 은은한 기운이 생성되었다. 바로 오러 블레이드였다. 레리아가 볼 때는 오러 블레이드였다.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강기였다. 호신강기.
  에이라나가 호신강기를 사용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검을 뽑았다. 화살들이 모두 호신강기에 튕겨져 나갔다.
  그것을 보며 화살을 쏘아댄 인물들이 움찔했다.
  "나를 공격한 것들을 가만두지 않는 게 내 지론이다."
  에이라나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살기가 베어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다 죽었어!"
  파앗!
  엄청난 속도로 화살이 날아오 곳으로 돌진하는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말리려는 레리아와 마법과 화살을 쏘아대는 이들로 인해 그곳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   *   *
  레리아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마을 사람들이 어이없게 모두 바닥에 누워버린 것이다. 물론 숨은 붙어 있었다. 아까 자신이 엘프 한 명을 죽이려는 에이라나를 말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그 이유를 알수 없었지만 주춤하다가 냅다 기절시키는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가 그들을 기절시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공격할 때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까 전에 날아왔던 화살 공격도 생각해보니 그저 얼굴을 스치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살기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데 죽일 이유는 없다.
  그렇다 해도 공격은 받았으니 화는 풀어야겠다. 그래서 검면으로 머리를 가격해 기절시키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모든 엘프들을 눕히고 에이라나가 말했다.
  "거, 정말 마법이랑 화살 한번 잘 쓰는구만."
  에이라나의 말에 레리아가 물었다.
  "너, 너 정체가 뭐야?"
  그러자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람."
  레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
  "어, 이것들 귀가 왜 이래?"
  에이라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엘프들의 귀를 보고 놀란 것이다. 귀가 일반인에 비해 두 배나 길고 뾰족했던 것이다. 당황한 에이라나의 말에 레리아가 말했다.
  "왜 그렇긴, 엘프니깐 그렇지."
  에이라나가 레리아를 보며 말했다.
  "엘...프?"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레리아가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자신의 귀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래. 엘프 처음 봐?"
  "흐엑!"
  레리아가 자신의 귀를 에이라나 눈앞까지 들이밀며 물었다.
  그러자 에이라나가 놀라 뒤로 넘어졌다. 그런 에이라나 때문에 황당해지는 레리아였다.
  아까는 아무렇지 않게 엘프들의 머리를 가격하던 소녀. 그런 소녀가 고작 자신의 귀를 보며 놀라다니...
  "너... 이, 인간 맞아?"
  어이가 없어진 레리아였다.
  그리고 다음에 들리는 에이라나의 말에 더더욱 어이없어지는 레리아였다.
  "아님 몬스터?"
  그러자 레리아가 버럭 소리쳤다.
  "캭! 엘프라니깐! 엘프! 그것도 하이엘프! 인간과 몬스터 따위와 다르다고! 넌 유사인종도 모르냐!"
  레리아의 말에 에이라나가 물었다.
  유사인종?"
  에이라나는 몰랐다. 이 세계에 유사인종이라는 엘프, 드워프, 묘인족, 인어족 등 인간보다 더욱 뛰어난 종족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왜 모를까? 150년 동안 레어에서 책을 읽었던 그녀인데 말이다.
  그건 바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드래곤과 인간에 관한 책만 읽었던 것이다. 가끔씩 인간 사회에 나왔다는 엘프나 드워프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그저 '어느 부족의 이름이겠지'하고 넘긴 것이었다.
  무엇보다 거의 100살 때부터 150살 때까지는 죽어라 무공만 수련했으니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에이라나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너 정말 대륙인 맞아?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 있어?"
  관심이 없는 거라니깐!
  에이라나가 말했다.
  "그럼 집에서 유사인종에 대한 책을 보면 되겠네."
  그렇게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누구야!"
  갑자기 에이라나가 소리쳤다. 그리고 바로 살기가 느껴진 곳에 지강을 날리는 에이라나였다.
  엄청난 관통력을 지닌 지강! 은빛 지강이 날아간 곳에서는 역시 지강과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깡! 깡!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저 견제를 하는 의미에서 지강을 날린 거랄까? 에이라나의 감각에 잡힌 이는 모두 셋! 그중 강한 자는 그랜드소드마스터급의 검사였다.
  "빨랑 나와!"
  에이라나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랜드소드마스터급의 검사는 30년 전 만난 라타파칸을 능가할 정도로 강한 기세를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라나가 으르렁거리자 레리아가 말했다.
  "얘는 나쁜 애가 아니에요, 공격하지 마세요!"
  그러자 스산하게 느껴지던 살기가 뚝 멈췄다. 그리고 수풀을 해치며 한 여인과 두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역시 셋 다 엘프였다. 모두가 소드마스터급의 검사였다.
  더 이상 살기가 느껴지지 않자 에이라나도 살기를 거두었다. 그렇다 해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여인이 말했다.
  "레리아, 괜찮니?"
  고개를 끄덕이는 레리아. 그런 레리아를 보며 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왜 다 쓰러져 있지?"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당연히 나를 공격했으니깐! 내가 다 눕혀버렸지."
  에이라나의 심드렁한 말투에 여인이 에이라나를 노려보았다.
  그랜드소드마스터급의 엘프 여인. 그 여인은 엄청난 대도를 등에 매고 있었다. 파괴력 면에서는 검을 능가하는 도! 자신의 몸만 한 크기의 대도를 저런 호리호리한 팔로 휘두른다?
  에이라나는 순간 '저 대도가 생각보다 가벼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상황에서 그 생각을 접었다.
  쿵!
  "네가 눕혔다고?"
  다시 살기를 뿌리는 여인. 그 여인은 도를 뽑아 땅을 내려쳤다. 그러자 땅 거죽이 뒤집혔다. 저 엄청난 크기의 검을 어떻게 저런 얇은 팔로 휘두른단 말인가?
  물론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내공을 이용해 힘을 강하게 만들고 휘두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순수한 육체적 힘을 가지고 그것을 휘두르고 있었다.
  에이라나가 질렸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도를 휘두를 수 있지?"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해!"
  그러자 에이라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바로 여인의 눈이 번뜩했다.
  부웅!
  그리고 바로 도를 휘두르는 여인. 엄청난 바람소리와 함께 여인의 도가 에이라나를 양단 낼 듯 덤벼들었다. 에이라나는 히죽 웃으며 검으로 도를 막을 뿐이었다. 그런 에이라나를 여인이 비웃었다.
  이렇게 커다란 도를 저런 투박하고 무뎌 빠진 검으로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스륵.
  검과 도가 부딪치자마자 쇠 소리는 안 나고 뭔가 흘러가는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인이 중심을 잃고 바로 쓰러진 것이다.
  그런 여인의 멱살을 잡고 에이라나가 바로 롱소드를 여인의 목에 가져다대었다. 너무도 깔끔한 동작에 마른침을 삼키는 여인을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검을 든 대결에서는 방심하면 바로 죽음과 직결될 수 있다는 걸 모르나?"
  그렇게 말하며 에이라나는 여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차갑게 말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여인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엘프 청년이 물었다.
  "로카나님. 괜찮으십니까?"
  여인의 이름이 '로카나'인 것 같았다. 로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로카나를 바라보던 에이라나가 말했다.
  "눕히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다. 기절시켰을 뿐이지."
  심드렁하게 말하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빤히 바라보던 로카나가 물었다.
  "너, 정체가 뭐냐?"
  그러자 에이라나가 히죽 웃었다.
  "사람."
  “아무리 기절시켰다 해도 우리 마을 사람들을 공격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아까 레리아가 분명 도움요청을 했다. 그만큼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했겠지."
  그러자 어깨를 으쓱한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그건 아마 환상을 봐서 그럴거야."
  "환상?"
  에이라나의 말에 로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로카나를 보며 에이라나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저 애를 처참하게 찢어발겨 죽이는 환상!"
  그러자 레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때의 공포가 되 살아난 것이다. 그런 레리아를 바라본 로카나가 말했다.
  "너...절대 용서할 수 없겠군."
  상대가 만만치 않았으나 로카나는 자신이 있었다.
  방금 전에는 살기도 들어 있지 않은 검이었다. 다시 말해 그저 가볍게 휘둘렀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격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제대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카나의 말에 에이라나가 로카나를 도발하듯 손으로 목을 그으며 말했다.
  "용서 안 하면 죽이게? 죽여 봐, 죽여 봐!"
  그러자 도를 들어 올리며 기세를 올리는 로카나. 그런 로카나를 보며 레리아가 말했다.
  "로, 로카나 언니! 그만해요!"
  그러자 움찔하는 로카나. 하지만 다음에 나온 에이라나의 말에 바로 에이라나에게 달려드는 로카나였다.
  "넌 빠져. 난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깐."
  자신을 상대로 시험하겠다는 에이라나의 말에 발끈하는 로카나였다.
  에이라나는 그런 로카나를 보며 히죽거렸다. 일부러 로카나를 도발한 것이다. 소드마스터인 로카나와 겨룸으로써 자신이 헤매고 있는 현경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로카나가 풀 스윙(?)을 하며 도를 내질렀다. 하지만 베는 느낌이 없자 당황하는 로카나였다. 하지만 곧 도에서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자 도로 고개를 돌린 로카나!
  그곳에는 차가운 눈을 한 에이라나가 도 위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팟!
  퍽!
  "컥!"
  에이라나는 자신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로카나에게 달려가 이마를 무릎으로 차버렸다.
  그러자 바로 쓰러지는 로카나.
  그런 로카나를 향해 검을 찔러 넣는 에이라나!
  이에 로카나가 몸을 굴려 검을 피했다. 이마가 깨졌는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에이라나를 노려보았다.
  에이라나는 가볍게 360도 회전하며 착지했다. 너무도 깔끔한 동작.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로카나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도를 다시 내지르며 소리쳤다.
  "도풍!"
  그러자 바람의 칼날이 에이라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라타파칸이 사용했던 기술과 같았다. 다르다면 무기가 도라는 점?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내는 기술 같았다. 바로 검풍의 특징을 파악한 에이라나였다. 그것은 이곳의 기사들에게 있어 알아도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반명 에이라나는 그저 심드렁할 뿐이었다.
  "잘됐군."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눈이 번뜩였다. 자신에게는 저것과 아주 잘 어울리게 맞대응 해줄 공격이 하나 있었다.
  "천마광풍!"
  역시 바람의 칼날. 하지만 위력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 에이라나의 은빛 검강이 아니었다. 원래라면 은빛 바람의 칼날이 생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성된 것은 바로 검은 바람의 칼날! 마교의 상징! 마교의 검은 검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기와 어울리는 무공답게 파괴력 자체가 달랐다.
  로카나의 검풍을 능가하는 엄청난 공격.
  그런 천마광풍을 보며 로카나가 당황하며 도풍을 몇 번 더 날렸다. 하지만 갑자기 검풍과 천마광풍의 충돌 직전 두 기운이 사라졌다.
  그것에 두 사람은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나타난 연두 빛 눈동자에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보며 모두가 놀랐다. 특히 엘프들은 그런 남자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에이라나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순수한 자연의 기운에 감탄했다. 완벽한 자연 그 자체를 보는듯한 기운. 그것도 풍의 기운이었다.
  에이라나가 감탄했다.
  "와~ 저렇게 완벽한 자연의 기운을 가진 존재도 있었나?"
  그런 에이라나의 말을 들었다면 모두가 어이없어 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에이라나는 정령에 대한 것조차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에이라나는 다음에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더더욱 놀랬다.
  "실버 일족의 해츨링께서는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군요. 정령을 모르시는 듯한 말투로 말하십니다?"
  "흐엑!"
  뒤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에이라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생긋 울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는 웃음.
  에이라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엘프가 사과했다.
  "저희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실버 일족의 해츨링 에이라나님."
  그는 에이라나의 정체를 아는 것처럼 보였다.
   *   *   *
  에이라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엘프 마을에 와 있었다. 그리고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에이라나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맛있네."
  과일 차 같았는데 향도 좋았고 너무 달지도 않았다. 그러자 아까 에이라나를 마을에 초대한 엘프 남자, 바로 마을의 촌장일 엘로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런 엘로카를 보며 에이라나가 삐질 땀을 흘렸다.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며 덤비던 로카나와 레리아도 자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드래곤의 해츨링이라는 존재가 어떤 건지 잘 파악하지 못한 에이라나였다. 해츨링이 다친다면 그 대상은 전 드래곤의 척살 대상이 된다. 전 드래곤들의 척살 대상이 된다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모르는 에이라나.
  에이라나가 엘로카를 보며 물었다.
  "내가 해츨링이라는건 어떻게 알았어?"
  엘프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를 너무도 쉽게 알아차린 엘로카가 신기한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엘로카가 말했다.
  "이렇게 보여도 전 874살이나 먹었습니다. 위대하신 분들을 보면 숨겨진 찌릿찌릿한 마나가 느껴집니다. 특유의 기운들을 가지고들 계시거든요."
  엘로카가 천재라는 점도 한몫했다. 엘로카는 9클래스 마스터의 마법사이며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한 엘프이기도 했다. 그런 엘로카의 힘은 2,000살 정도의 웜급 드래곤과 맞먹는다. 드래곤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엘로카였다.
  그의 말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아직 사리구별 못하는 에이라나였다.
  그렇게 있을 때 엘로카 옆에 당당하게 앉아 있던 연두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야!"
  에이라나에게 바로 반말하는 그. 그러자 에이라나가 의아한듯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도 자연과 동화된 듯한 그. 인간도 아니고 엘프도 아니다. 드래곤도 아닌데 자신의 할머니보다 더 강해보였다.
  에이라나가 자신을 관찰하듯 쳐다보는 것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바로 그의 정체였다.
  실피드는 에이라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실버 일족이다. 그래, 실버 일족이 맞다. 하지만 아까 보였던 그 검은빛 오러 블레이드, 바로 마기였다. 블랙드래곤의 마기.
  어떻게 실버 일족이 블랙 일족의 마기를 사용한 걸까? 아무리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하나가 블랙 일족이라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피드가 물었다.
  "너 실버 일족이지?"
  그러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실피드가 되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블랙 일족의 마기를 사용했지?"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실피드는 궁금했다. 그런 실피드를 보며 피식 웃은 에이라나.
  "내 아버지가 블랙 일족이거든."
  그러자 인상을 찌푸리는 실피드.
  "아무리 그래도 다른 일족 특유의 기운을 사용할 수는 없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바로 천마심법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기운을 마기로 전환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천마가 엄청난 노력 끝에 만들어낸 중원 최고의 내공심법 이었던 것이다. 그 어떤 심법도 천마심법을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천마심법으로 쌓은 마기는 마기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기까지 했다. 바로 블랙드래곤의 마기처럼.
  뭐, 순수한 마기만큼 깨끗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런 천마심법으로 내공을 쌓던 에이라나.
  3갑자 이상에서 내공을 더 이상 모으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내공심법과 명상을 하면 더욱 효과가 있기 때문에 내공심법을 늘 응용하는 그녀였다.
  그런데 바로 3년 전에 변화가 생겼다.
  엘란카넌, 레랴나스, 에랴나니스도 알아차리지 못한 변화였다. 모으자마자 실버드래곤의 기운으로 전환되어 특유의 냉기를 뿜어내던 에이라나의 내공이 마기를 띠기 시작한 것이다.    천마심법의 힘이었다. 전생처럼 마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더욱 놀란 에이라나였다.
  마기의 기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더불어 하나 더 바뀐 것이 있었다. 브랙드래곤의 피까지 깨어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흠칫!
  자신을 주시하던 에이라나를 보며 흠칫하며 굳은 실피드.
  실피드 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던 모든 이가 굳었다. 굳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라나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변했기 때문이다.
  검은색! 블랙 일족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
  그리고 실버 일족 특유의 냉기가 사라지고 스한 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실피드와 엘로카는 그것을 보고 경악했다. 자신들의 눈에는 이제 에이라나는 실버드래곤이 아닌 블랙드래곤으로 보였다. 아니, 블랙드래곤이었다.
  "내 경우가 이상한 건가? 난 두개의 기운을 품고 있어."
  실버 일족의 기운과 블랙 일족의 기운.
  바로 빙의 마나와 내공, 마의 마나와 내공을 동시에 품은 에이라나였다.
  이것은 드래곤 역사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대 사건이었다.
  그 말은, 즉 에이라나는 실버 일족이면서도 블랙 일족으로 한 드래곤이 두 개의 종족을 가진 것이었다.
  그렇다고 더 강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더 컸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에이라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에이라나가 으쓱거리며 자신의 흑발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할머니 왔다~아."
  갑자기 빛이 번쩍 하더니 적발에 적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바로 레랴나스였다.
  에랴나니스를 화려하게 격파(?)하고 왔는지 표정이 상큼(?)발랄(?) 그 자체였다. 아무튼 갑자기 나타난 레랴나스를 보며 모두가 당황하여 허둥지둥 예를 차리기 시작했다.
  예를 차리지 않은 이는 에이라나와 실피드뿐이었다. 실피드가 레랴나스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레랴나스."
  그러자 레랴나스가 말했다.
  "여~ 천하의 바람둥이, 오랜만."
  그 말에 실피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바람둥이'란 말은 빼지?"
  그러자 어깨를 으쓱한 레랴나스가 말했다.
  "사실인걸. 저번에는 또 그린 일족의 아이에게 찝쩍거리다 그 아이의 남편과 맞장 떴다지? 유부녀는 건드리지 말라고."
  레랴나스의 말에 실피드가 발끈했다.
  "캭! 지금 그 소리가 왜 나와?"
  이 정령왕, 상당히 바람둥이인 것 같았다.
  하긴 얼굴을 모든 정령왕이 그렇듯 엄청난 미남자이니 말이다. 그리고 특유의 바람의 정령왕들이 가진 바람기가 있으니.
  레랴나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내 손녀에게 찝쩍거리면 아마 엘란카넌이랑 나랑 에랴나니스, 카랴만과 싸워야 할 걸? 너 저번에 에랴나니스에게 찝쩍거리다 카랴만과 싸웠었지? 그때 감정의 골이 아주 깊었던것 같던데,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마."
  레랴나스의 말에 실피드가 말했다.
  "카랴만, 그 싸가지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그건 그렇고 이녀석이 네 손녀이자 에랴나니스의 딸?"
  실피드가 새삼스럽다는 듯 에이라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지? 저 모녀들 사이에서 자랐다면 성격이 지랄 같을 게 분명한데."
  "죽을래?"
  실피드의 말에 바로 날카로운 눈을 하는 레랴나스.
  아닌 게 아니라 매일 성격 더러운 엄마, 할머니 옆에 있으면 성격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실피드가 보기에 에이라나는 너무도 멀쩡했다. 아니, 아주 특이한 점까지 있다.
  "아니지 특이하기는 하네. 실버 일족과 블랙 일족, 두 일족의 기운을 동시에 가진 드래곤은 드래곤 역사상 처음일 테니 말이야."
  실피드의 말에 레랴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그건 또 뭔 헛소리야?"
  레랴나스는 보았다. 그곳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블랙 일족의 해츨링 한 명을.
  자신이 보기에는 그 블랙 일족의 아이는 에이라나 또래의 아이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절대로 지금 에이라나 또래의 블랙 해츨링은 없다. 적어도 100살은 차이 났던 것이다.
  그래, 그 정도는 이해한다. 애를 숨겼을 수도 있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블랙 일족의 아이가 에이라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드래곤들은 남의 폴리모프 모습을 따라하지 않는다.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드래곤들이 남을 따라할 리가 없었다.
  뭐, 처음 폴리모프를 하는 해츨링들은 부모를 모델로 폴리모프 하기 때문에 비슷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처럼 보일 정도로밖에 비슷하지 않았다. 저렇게 쌍둥이 처럼 똑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기 앉아서 어색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랙족의 아이는 뭔가? 혹시 에이라나를 따라한 폴리모프?
  그럴 수도 있다. 아니, 그렇다고 굳게 믿는 레랴나스였다. 하지만 다음에 벌어진 상황에 굳어버렸다.
  사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그 바람에 찰랑거리던 블랙 일족 아이의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장면에 멍해지는 레랴나스. 그리고 이윽고 자신의 앞에는 실버드래곤인 자신의 손녀 에이라나가 나타났다.
  겨우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바뀌었을 뿐인데 풍기는 기운은 완전 딴판이었다. 에이라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할머니,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어요?"
  레랴나스는 그것을 보고 기절했다.
   *   *   *
  에이라나가 잠시 스턴상태에 빠진 레랴나스를 쳐다보았다. 기절한지 5분 만에 깨어난 것이다.
  레랴나스는 에이라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어색하게 웃는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실피드가 말했다.
  "돌연변이."
  그러자 에이라나가 바로 소리쳤다.
  "캭! 지금 누구보고 돌연변이라는 거얏!"
  실피드의 말에 바로 반발하는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랴나스가 물었다.
  "에이라나야, 어떻게 된 거니?"
  누구보다도 드래곤에 대해 잘 아는 레랴나스였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다. 그러니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8,000살의 고룡이 기절할 만큼의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두 개의 종족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에이라나를 보며 레랴나스가 말했다.
  "에이라나야."
  레랴나스의 부름에 에이라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레랴나스를 돌아보았다.
  "예?"
  "언제부터 블랙 일족의 기운을 가지게 되었니?"
  "3년 전이요."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랴나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혹시 몸에 균형이 안 맞지는 않니? 아니면 몸이 이상하다거나..."
  레랴나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에이라나를 보았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돌연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자신의 손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한몸에 두 개의 기운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원래 있던 기운이 변화된 것에 불과하기에 그렇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아무 문제도 없구요."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레랴나스였다.
  일단 자신이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인데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실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신기한 가족이라니깐?"
  그런 실피드를 보며 레랴나스가 말했다.
  "입 다물어, 바람둥이."
  그리고 에이라나를 보며 말했다.
  “에이라나야, 일단 두 개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로드와 가족들에게만 알리자꾸나."
  다른 이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조금 골치 아파진다. 특히 실버 일족과 블랙 일족이 크게 부딪칠지도 몰랐다. 서로 자신 일족의 드래곤이라며 충돌이 나면 골치가 더럽게 아파진다.
  일단 그렇게 된다면 중요한 투표 때 투표권이 두 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아해하며 에이라나의 몸을 검사하는 이들도 생길지도 몰랐다. 두 개의 기운을 함께 가진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레랴나스를 보며 실피드가 말했다.
  "이봐, 레랴나스."
  그러자 실피드를 쳐다보는 레랴나스.
  "이건 충고하는 건데 마족들을 조심해. 저 녀석 정도라면 '그 사건'을 일으켜 에이라나를 마족으로 만들지도 모르니깐."
  그러자 레랴나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자신의 친구 중에서도 그 일에 당해 마족이 된 드래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레랴나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놈을 조심하는게 더 좋을듯하다."
  그러자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실피드.
  "당연하지. 벌써 난 저 녀석을 찜 했다고."
  그러자 바로 나오는 목소리.
  "씨발, 아까부터 지랄한다?"
  바로 에이라나였다.
  에이라나의 말에 실피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레랴나스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개소리 하지 마."
  정말 어울리는 조손이 아닐수 없었다.
  "꺅! 신기해! 에이라나 다시 해봐!"
  에랴나니스가 신기하다는 듯 에이라나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에이라나가 말했다.
  "싫어."
  그러자 에랴나니스 왈!
  "왜, 재미있는데?"
  그 말에 에이라나가 다시 맞받아 쳤다.
  "내가 광대야?"
  "아니."
  에이라나가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그럼 희귀한 동물 쳐다보듯 하지 마!"
  에랴나니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신기한 걸."
  그리고 흑발이 되어 있는 에이라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에 에이라나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지 못하게 하려고했다. 하지만 에랴나니스는 생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뿐이었다.
  "악!"
  "아무리 봐도 신기해~ 블랙족의 기운이라니."
  그러게 에이라나의 얼굴이며 몸을 이리저리 더듬는(?) 에랴나니스였다.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에이라나. 하지만 힘으로 어떻게 에이라나가 에랴나니스를 이긴단 말인가? 그래도 에이라나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
  퍽!
  "커억!"
  바로 레랴나스였다.
  "어디서 딸을 장난감 취급해? 저기 찌그러져 있어!"
  "흑! 너무해."
  레랴나스의 말에 에랴나니스가 훌쩍이며 구석으로 들어가 찌그러졌다. 그것을 보며 땀을 삐질 흘리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랴나스가 말했다.
  "저건 맞아도 싸."
  그런 레랴나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이제는 익숙한 은발에 은안으로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되돌리며 말했다.
  "할머니, 레어 구경 좀 시켜줘요."
  레랴나스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렇게 사라지는 두 드래곤을 보며 에랴나니스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에고~ 난 온천에나 들어갈란다."
  레랴나스에게 얻어터져 온몸이 뻐근한 상태의 에랴나니스였다. 온천에 가서 고통을 해소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레랴나스의 레어는 정말 넓었다. 자세히 돌아다녀 보니 생각보다 더 넓은 것 같았다. 보물고도 훨씬 컸다. 에랴나니스의 세배는 될 것 같았다.
  입이 쩍 벌어지는 에이라나였다.
  그렇게 레어를 모두 둘러본 에이라나는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은 몇 십 개는 될 것 같았다. 에이라나는 그중 한 곳에 들어가 몸을 담갔다. 몸을 타고 올라오는 따뜻한 기분에 에이라나가 말했다.
  "아! 따뜻하니까 기분 좋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목욕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에이라나는 그렇게 몸을 풀어주며 헤엄을 쳤다. 온천이 넓어 헤엄을 칠 수 있었다. 그때였다.
  "허억!"
  갑자기 어디선가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라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적발에 적안을 가진 한 소년이 놀란 듯 헛바람을 들이키며 에이라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많이 익숙했다.
  에이라나가 의아한 듯 그의 이름을 말했다.
  "레니스?"
  그는 바로 레니스였다.
  레니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레니스가 레랴나스의 레어오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아라케니가 온천에 간다고 데려온 것이다.
  아라케니는 에랴나니스와 친구였다. 그렇기에 레랴나스의 레어로 놀러가도 되냐고 물어서 된다고 하자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놀러온 것이다.
  레니스는 '나도 온천에나 들어갈까?' 하다가 우연히 에이라나가 목욕하던 온천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에이라나가 레니스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뭐야? 너 어떻게 왔어?"
  자신의 할머니의 레어에 저 녀석은 어떻게 들어왔단 말인가?
  에이라나가 의아한 듯 묻자 레니스가 당황하며 말했다.
  "너, 너야말로 어떻게 여기에."
  그러자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할머니 레어에 내가 왔는데 당연한 거지. 난 우리 할머니 레어도 못 오냐?"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러자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신경 끄셔!"
  그리고 레니스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야?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나갈 거면 나가!"
  "무슨 여자애가..."
  드래곤들도 엄연히 성별이 구별되어 있다. 드래곤들은 성별에 별로 민감하지 않다고 인간들은 생각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종족끼리는 이성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민감했다. 물론 이성이라고 생각한 상대에게만 그렇지만 말이다.
  엄연히 여자애인 에이라나가 나신을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있으니 너무도 당황스러운 레니스였다.
  레니스의 말에 에이라나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생겼다.
  촥!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기겁한 레니스가 얼굴을 돌렸다.
  터벅! 터벅! 터벅!
  온천 근처는 돌로 되어 있어 물에 젖은 에이라나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레니스는 에이라나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당황했다. 그리고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자신을 보게 하자 더욱 당황했다.
  "야!"
  "왜, 왜?"
  빽 소리치는 에이라나에게 레니스가 당혹해하며 대답했다.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가 '무슨 여자애가'야! 그 말 엄청 기분 나빠!"
  아직 자신을 남자로 자각한 에이라나였다.
  보통 여자들의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자각도 안 되었는데 나신 좀 보인다고 뭐가 어떤가? 그리고 마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에이라나다. 만약에 에이라나가 전생에 여자였다 해도 똑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래, 나신 좀 보이면 어떠냐?' 이런 식으로.
  레니스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미, 미안."
  그런 레니스를 보며 멱살을 놓아준 에이라나가 빤히 레니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레니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에이라나가 말했다.
  "풋, 귀엽다."
  그러자 발끈하는 레니스.
  "뭐얏?"
  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나신의 에이라나 때문에 고개를 돌리는 레니스였다.
  "오, 온천에 들어가든가, 아님 뭐라도 입어!"
  "왜?"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니스가 오히려 당황해했다. 레니스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이성으로 보게 된 에이라나. 그런 그녀가 지금 나신 차림으로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에이라나를 안아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그러면 죽도록 맞겠지만...
  '단순히 안아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레니스였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고는 기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레니스에게 말했다.
  "너 이상한 상상했지?"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가 기겁하며 말했다.
  "아, 아니야!"
  하지만 전혀 신빙성이 없었다.
  "흐응~ 신빙성이 전혀 없는데?"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조, 조금."
  "킥!"
  에이라나는 그런 순진무구한 레니스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싸가지 없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얼마 전부터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성이 아닌 친구로서 말이다.
  레니스의 반응에 재미있어 하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정 그러면 해줘?"
  "헉!"
  에이라나의 은근한 말투에 헛바람을 들이키는 레니스였다.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레니스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러고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과연 저 말의 뜻은 무엇일까? 자신을 이성으로 본다는 뜻?
  레니스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깐.
  이렇게 보면 에이라나가 참 사악했다.
  아무튼 복잡해지는 레니스의 얼굴을 보고 그 반응에 웃음을 참느라 고생하는 에이라나였다. 하지만 에이라나가 실수한게 있었다. 아무리 순진해 보여도 레니스는 레드 일족이다.
  너무 방심한 것이었다. 레니스처럼 순남이면 절대 자신을 못 덮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게 실수였다.
  레니스가 바로 생각을 끝내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에이라나를 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친 것이다.
  레니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이라나도 굳었다. 레니스가 에이라나의 허리를 감은 자신의 팔에 힘을 주며 에이라나의 입술을 자신의 혀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굳어 있던 에이라나가 정신을 차렸다.
  에이라나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에이라나의 갑작스러운 발버둥에 당황한 레니스가 발을 헛디뎠다. 그들은 온천 바로 옆에 서 있었기에 둘은 그대로 뜨거운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풍덩!
  그렇게 에이라나는 레니스의 품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레니스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에이라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하지만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소리쳤다.
  "넌 하라고 진짜 하냐!"
  "나, 난 진짠 줄 알았지!"
  레니스가 소리쳤지만 에이라나 역시 만만치 않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썅! 넌 장난이랑 진담도 구별 못하냐!"
  레니스가 또다시 소리쳤다.
  "네가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었잖아!"
  둘 따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잘못은 잘못이기에 에이라나가 짜증을 부리며 소리쳤다.
  "악! 짜증나!"
  그리고 고개를 획 돌리며 밖으로 나가서 옷을 입고 나가버렸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당황한 레니스가 에이라나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 어! 에이라나!"
  만약에 에이라나와 결혼한다면 카랴만 못지않은 공처가가 될것 같은 레니스였다.
  그로부터 4일이 지났다.
  에이라나가 목욕하며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레니스에게 물었다.
  "얼씨구? 며칠 전과는 다르게 당당하네?"
  "어, 어차피 신경도 안 쓰잖아?"
  그러자 에이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군."
  같은 탕에서 혼욕을 하는 두 드래곤이었다. 레니스는 에이라나가 자신의 나신을 보인다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자 에이라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남자가 여자 나신 보는 걸 거부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라면 말이다. 그리고 에이라나와 붙어있는것 자체가 좋았다.
  에이라나도 레니스를 크게 거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친구라 봐도 될 듯했다. 하긴, 둘이 친구 먹기로 했으니깐.
  물론 레니스는 연인을 고집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바로 에이라나의 주먹이 날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레니스는 3일 전 일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레니스가 에이라나의 입술을 훔친 다음 날.
  역시 에이라나가 온천에서 수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레니스가 찾아왔다.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순진했던 레니스. 역시 에이라나가 알몸 차림이자 예상을 했지만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에이라나는 그런 레니스를 배려하려는 것인지 타월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레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것도 있었지만 아쉬움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갑자기 찾아온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뭐야, 왜 왔어?"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레니스.
  그런 레니스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에이라나. 드디어 레니스가 입을 열었다.
  "에이라나."
  "어."
  "우리 사귀자."
  레니스의 말에 대충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에이라나가 갑자기 레니스를 휙 쳐다보았다. 그리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 에이라나의 반응에 레니스는 '받아들여졌나?'라고 생각했다.
  "레니스, 일로와 봐."
  "어? 응."
  에이라나가 자신을 부르자 쪼르르 달려가는 레니스.
  그리고 잠시 후, 레니스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퍽!
  "컥!"
  자신의 머리에 하이킥을 날리는 에이라나 때문이다.
  언제 일어났을까?
  에이라나가 각선미를 드러내며 자신의 얼굴을 갈기자 바로 쓰러지는 레니스. 그런 레니스에게 달려들어 마구마구 밟기 시작하는 에이라나였다.
  퍽! 퍼버버버버버버벅!
  "커억! 아, 아파! 하, 하지 마!"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리 없는 에이라나가 아픈 곳만 골라 레니스를 팼다.
  그리고 잠시 후...
  타작을 멈추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헛소리 하지 마. 다음에는 죽는다?"
  생긋 웃는 에이라나를 보며 레니스가 몸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레니스를 잠시 쳐다보던 에이라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
  "응?"
  의아해하는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친구먹자."
  '친구먹자'가 뭐니?
  레니스가 빤히 에이라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일단 친구라도 돼야 연인이든 뭐든 도모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레니스였다. 에이라나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쳐다보던 레니스가 자신도 웃어주며 손을 잡아 일어났다. 에이라나는 근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친철한 드래곤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사혈사와 무연의 말을 잘 따르던 에이라나였다. 그래서 자신의 가족들을 잘 따랐다. 전생에 어릴 적부터 너무 정에 굶주리며 살았던 것이다. 에이라나의 그토록 밝은 표정은 처음 보는 레니스는 멍해졌다.
  "야!"
  에이라나가 굳어있는 레니스를 불렀다. 며칠 전 생각을 하던 레니스가 당황하며 정신을 차렸다.
  "어? 응?"
  레니스의 반응에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몇 번을 불렀는데! 감히 내 말을 씹어?"
  그러자 어색하게 웃는 레니스.
  "하하... 그, 그냥 다른 생각 좀 하느라."
  "그게 그거지!"
  "하하하."
  어색하게 젖은 붉은 머리를 긁적이는 레니스였다.
  에이라나는 그런 레니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일어섰다.
  촤악!
  그리고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흑심은 있다고 하나 순남(?)인 레니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레니스를 보며 킥 웃던 에이라나가 옷을 입으며 말했다.
  "나 엘프 마을에 갈 건데, 갈래?"
  에이라나가 옷을 입자 같이 옷을 입던 레니스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왜?"
  에이라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 무공 경지를 한 단계 업 시켜줄 엘프를 찾았거든. 할머니의 영역에 있는 엘프 마을에서."
  그리고 눈을 찡긋하는 에이라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따라가지 뭐."
  레니스는 몇 분 후 그 말을 후회했다.
  "헉헉... 가, 같이 가!"
  레니스의 외침에 에이라나가 멈칫하다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내자식이 체력이 왜 그렇게 약해?"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레니스가 소리쳤다.
  "네가 비정상적인 거다!"
  "에잉."
  한 시간째다.
  사실 저번 레리아와 에이라나의 추격전에서는 둘 다 거의 두시간동안을 달렸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말이다. 산에 익숙한 엘프였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뭐, 레니스도 숲에 익숙해지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익숙해지면'이었다. 아직 어린(?) 레니스였다. 숲에 익숙할 턱이 있나. 그런 일족이라면 몰라도...
  헉헉거리고 있는 레니스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에이라나와 그 시선에 얼굴이 빨개지는 레니스였다.
  어느 누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받고 싶겠는가?
  어디 앉을 곳이 없나 둘러보던 에이라나가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저기 앉자."
  그리고 빠르게 날아(?) 앉았다.
  그런 에이라나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레니스도 같이 앉았다. 잠시 쉬는 두 드래곤. 그때 갑자기 에이라나가 말했다.
  "하~ 이래서 언제 도착하나?"
  그 말에 움찔하는 레니스였다. 뭐,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찔릴 것이 아닌가? 한숨을 푹푹 쉬던 에이라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레니스, 너 나한테 업혀 가라."
  "엉? 뭔 헛소리야?!"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네 속도에 맞추니까 속도가 안 나잖아.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그냥 내 등에 곱게 업혀 가라."
  "야,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여자한테 업힌..."
  그렇게 말하던 레니스가 입을 다물었다.
  에이라나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눈초리에 레니스가 손을 들었다.
  "그냥 업힐게."
  그런 레니스를 보며 씨익 웃어준 에이라나가 업히라는 포즈를 취했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된 거야?'라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쉰 레니스가 업혔다.
  일단 에이라나는 자신보다 훨씬 빨랐다. 마나를 사용하는 듯 한데 그래도 그렇게 빠른 건 처음이었다. 자신도 마나로 몸을 활성화시켰지만 에이라나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꽉 잡아!"
  그 말과 함께 에이라나가 잡을 사이도 없이 튀어나갔다.
  "헉!"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에 깜짝 놀란 레니스는 떨어질뻔했다. 레니스가 에이라나의 등에 얼굴을 묻은 다음 목을 꽉 잡았다. 뭔 속도가 이렇게 빠르단 말인가?
  그 반응에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목 너무 세게 잡지 마! 숨 막혀!"
  그 말에 당황하며 목을 느슨하게 하는 레니스. 그리고 에이라나의 귀에 대고 물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이전에는 추격하느라 속도를 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젠 달랐다. 목적지가 있으니 냅다 달리면 되는 것이다. 에이라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빠르기만 한 줄 알아? 하늘을 걷는 것도 가능하지."
  쿵!
  말이 끝나자마자 에이라나가 공중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공중을 디뎠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소리와 함께 에이라나가 공중에 떴다.
  "어어어!"
  레니스는 플라이나 레비테이션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몸이 공중에 뜨자 놀랐다. 더 놀란 것은 에이라나가 바로 공중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플라이나 레비테이션 마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였다.
  허공답보. 허공을 걷는 기술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허공답보가 가능 하려면 적어도 현경의 경지 이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에이라나는 마법과 접하면서 아직 현경의 경지를 접하기도 전에 허공답보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허공섭물의 깨달음도 얻었다. 에이라나가 경공술을 이용해 하늘을 달리자 놀란 레니스가 말했다.
  "어, 어떻게 이렇게 빠른 거야?"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당연하지!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달리는 거니깐."
  에이라나의 말에 레니스가 말했다.
  "악! 장난치지 말고 자세히 설명해 봐!"
  그런 레니스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나중에 가르쳐줄게!"
  그렇게 말한 에이라나는 더 속력을 내겠다는 듯 공중을 더 강하게 박차며 뛰어갔다.
  엘프 마을은 역시 평화로웠다. 레랴나스가 관대해서 속 편하게 사는 엘프들이었다. 물론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고.
  실피드는 역시 바람둥이답게 엘프들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실피드의 모습은 연두색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긴 귀를 가진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이었다.
그는 레리아와 로카나, 두 엘프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둘 다 하이엘프라 보통 엘프보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이었다.
  레리아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으며 로카나는 묵묵히 자신의 대로를 휘두르고 있었다.
  "레리아~ 나랑 사귀자니깐?"
  "하하. 사양할게요, 실피드님."
  실피드의 집적거림에 어색하게 웃는 레리아. 그런 레리아에게 몸을 밀착시키려던 시피드.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퍽!  쿵!
  "켁!"
  갑자기 머리 위에 뭔가 있는 것을 느낀 실피드.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하며 앞면을 바닥에 찍어버리자 순간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다 왔다."
  그 다음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야, 너 뭐 깔고 착륙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작자는 밟아도 돼."
  그러면서 더 실피드의 머리를 꾹꾹 누르는 누군가!
  바로 에이라나와 레니스였다. 에이라나는 레니스를 내려주고 실피드의 등을 밟은 다음 실피드에게서 내려왔다. 그러자 바로 반응을 보이는 실피드.
  "캭! 어떤 자식이야?! 감히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님의 등을 밟은 놈이!"
  실피드의 외침에 레니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령왕이었어?"
  그러자 실피드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레니스를 보며 말했다.
  "넌 어디서 튀어나온 레드 일족의 해츨링이야?!"
  그런 실피드를 보며 에이라나가 한마디 했다.
  "거, 되게 시끄럽네. 지가 내가 내려앉을 자리에 있는 게 잘못이었지."
  에이라나의 말에 실피드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에이라나인 것을 알아차린 실피드가 말했다.
  "넌 레랴나스의 손녀?"
  "흥!"
  에이라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런 에이라나를 빤히 쳐다보던 실피드가 갑자기 에이라나 앞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오더니 에이라나의 허리를 잡고 말했다.
  "모든 걸 용서해줄게. 그 대신 네게 키스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 내가 키스해주는 것을 영광... 컥!"
  하지만 실피드의 헛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에이라나가 주먹으로 실피드의 면상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껄쭉하게 울려 퍼지는 욕 다발.
  "씨발, 지랄한다? 처뒈지고 싶지?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하지만 실피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더니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훗! 부끄러움 타기는."
  "우엑!"
  그 말에 바로 구토 증상을 보이는 에이라나였다.
  '정말 밥맛에 느끼한 녀석이다.'
  레니스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뭐 같은 성격은 바람의 정령왕에게도 죽지 않는구나.'
  에이라나가 구토 증상(?)을 멈추고는 실피드를 무시하며 로카나에게 말했다.
  "이봐!"
  힐끔 에이라나를 쳐다보는 로카나. 그런 로카나를 보며 씨익 웃은 에이라나가 말했다.
  "저번에 저 자식의 방해로 못한 대결을 마저 끝내자."
  그러며 실피드를 가리킨 에이라나. 실피드가 대답했다.
  "내가 방해했냐? 계약자가 부탁한 거지! 그리고 네가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아직 200살도 안 된 녀석이 어떻게 로카나를 이긴다는 거야?"
  실피드의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에이라나는 소드마스터다. 그런 에이라나가 어떻게 그랜드소드마스터를 이긴다는 것인가? 레리아와 로카나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리아가 말했다.
  "저... 에이라나, 그건 실피드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에이라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언제부터 나한테 존대했냐? 그냥 반말 까! 그리고 저딴 멍청한 자식의 말이 뭐가 맞는다는 거야?"
  에이라나의 말에 당황하는 레리아와 발끈하는 실피드.
  "썅! 내 말이 뭐가 어때서!"
  실피드의 말이 멍청한(?) 말이었다는 것은 레니스에 의해 증명되었다.
  "30년 전 에이라나는 라타파칸이라는 인간 그랜드소드마스터를 이겼어, 검술로."
  모두가 레니스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라타파칸'이라면 자신들도 잘 안다. 바로 30년 전에 죽었던 인간 최고의 검사가 아닌가? 로카나도 그와 붙은 적이 있었다.
  물론 이겼지만, 아무리 보아도 소드마스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에이라나가 그를 이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전에 잠깐 밀리는 듯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있는 로카나였다. 로카나의 눈빛이 바뀌었다.
  "좋아. 마저 끝내지."
  그렇게 말한 로카나가 도를 다 잡았다. 에이라나도 늘 가지고 다니는 투박한 롱 소드를 뽑고 로카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에이라나가 현경의 경지에 등극할지 말지의 중요한 비무의 시작이자, 이 일대가 초토화될 비무의 시작이었다. 아마 이 비무 이후 엘프들은 초토화된 숲을 보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   *   *
  쾅!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과 함께 에이라나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쳇! 정말 무식한 힘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라나가 나무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런 에이라나를 향해 도강을 날리는 로카나. 그것을 검강을 이용해 막는 에이라나였다.
  쾅!
  다시 튕겨져 나가는 에이라나. 그런 에이라나를 향해 거대한 도를 휘두르는 로카나. 그런 로카나의 도를 다시 막는 에이라나...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쾅!
  계속되는 공방전.
  조금씩 에이라나가 밀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라타파칸 보다는 역시 로카나가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라타파칸의 대결에서는 거의 호각으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라타파칸의 빈틈을 노린 에이라나가 이긴 것이다. 에이라나의 초식에 당황한 라타파칸의 실수였다. 전투 경험은 라타파칸이 앞서지만 고수들의 대결에서는 에이라나의 경험이 더 앞섰기 때문에 에이라나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에이라나가 가볍고 여유롭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슬쩍 웃었다. 에이라나에게 달려들던 로카나는 그 웃음에 움찔했다.
  휙!
  "헉!"
  에이라나가 이영환휘를 이용해 잔상을 남기며 로카나에게 휘둘렀다. 느린 듯하며 빠르게 잔상을 남기는 이동에 경악한 로카나의 스텝이 꼬였다.
  슥!
  살짝 뺨을 스치는 공격. 따끔함을 느낀 로카나가 뒤로 물러섰다. 싸움 이후 첫 상처는 로카나가 입은 것이다. 중원 무림에서 고수들의 싸움은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싸움이었다.
  고수들이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의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확률이 높았다. 다시 말해 중원의 고수들의 실력은 거의 종이 한장 차이, 즉 자잘한 깨달음의 차이에서 승부가 난다고 할 수 있었다.
  상대 쪽이 경지가 더 높다 해도 무언가 그쪽에는 없고 이쪽에는 있는 깨달음이 있다면 자신이 이길 수도 있었다. 물론 이건 절정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랴샨 대륙의 마스터들은 상활이 달랐다. 저쪽이 한단계라도 경지가 높으며 조금이라도 마나가 많다면 무조건 모든 것이 부족한 자들이 지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오러 블레이드를 이용해 베는 식의 검술이다. 중원처럼 오러 블레이드, 즉 강기를 섬세하게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원 무림에서는 강기 운영의 섬세함에 따라서도 승부가 났는데 말이다.
  로카나는 자신이 밀어 붙이는 듯하면서도 은연중에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로카나를 보며 에이라나가 말했다.
  "내가 당신보다 훨씬 하수로 보여?"
  로카나를 차갑게 비웃는 에이라나였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로카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랬다. 자신이 보기에 검술로 따지자면 에이라나는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물론 라타파칸을 이겼다는 타이틀이 있지만 그건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라타파칸이 조금 지쳐있거나 주위의 방해가 있었거나...
  에이라나가 그 생각을 읽었는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멍청하군. 고수, 아니 이곳에서 마스터인가? 아무튼 이곳에선 자신보다 하수의 마스터를 보면 자신이 꼭 이긴다는 이상한 사상에 절어 있는 것 같아."
  에이라나의 말에 로카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뜻..."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로카나를 보며 에이라나가 냉소하며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지. 당신은 나보다 경지는 높아. 하지만!"
  에이라나의 검강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것을 보고 경악하는 레리아, 실피드! 레니스는 한 번 본 일이기에 담담하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깨달음의 면에서는 당신은 나보다 훨씬 아래라는 뜻이지! 검술은 경지의 싸움이 아니야! 물론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깨달음이 필요하지! 하지만 그건 깨달음의 일부 일 뿐, 다음 경지로 넘어가지 못해도 다른 깨달음이 많다면 자신보다 더 강한 마스터를 이길 수 있다! 리샨 대륙은 그걸 몰라."
  그 말에 로카나가 멍해졌다. 그런 로카나를 보며 에이라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면에서, 당신은 나보다 하수야."
  쿵!
  "천마환영보!"
  에이라나의 말과 동시에 에이라나와 같은 환상이 생겨났다.
  "헉!"
  그것을 보고 경악하는 로카나! 마법이 아니었다. 환상 하나하나느 검사들이 사용하는 기운과 비슷한 것이 서려 있었다.
  에이라나가 로카나의 뒤에서 나타나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뒤에서 짜릿한 살기가 느껴지자 깜짝 놀란 로카나가 도에 날이 없는 쪽을 손으로 잡으면서까지 에이라나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로카나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컥!"
  그리고 엄청난 내상을 입은 듯 피를 한 움큼 토했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로카나였다.
  쾅! 쾅! 쾅! 콰가가가가가강! 쾅!
  에이라나가 한번 당해보라는 듯 로카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전과는 반대되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로카나의 몸 하나하나에 자잘한 생체기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보며 레니스를 제외한 모두가 놀라워했다.
  어느새 숲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오자 우르르 몰려온 엘프들도 그 광경을 경악하며 쳐다보았다. 어떤 엘프들은 숲이 초토화되기 시작하자 그것을 보며 기절까지 해버렸다.
  쾅!
  다시 한 번 에이라나의 투박한 롱 소드와 로카나의 대도가 부딪쳤다. 그리고 로카나가 다시 튕겨져 나갔다. 나무도 뽑아 휘두를 로카나의 괴력을 잘 아는 엘프들은 그대로 경악했다. 그렇게 로카나를 날려버린 에이라나가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라나도 상당히 지쳐있었다. 물론 로카나 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다시 로카나에게 달려들려던 에이라나가 멈칫했다. 에이라나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던 로카나도 멈칫하는 에이라나를 보며 숨을 돌렸다.
  잠시 가만히 서서 휙휙 검을 휘드르던 에이라나는 그 행동까지 멈췄다. 그런 에이라나를 보며 갑자기 오한이 드는 로카나였다. 에이라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네 덕에 드디어 현경의 경지, 즉 그랜드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어."
  그 말에 주위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카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에이라나가 자신과 비무를 한 이유가 그랜드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런 로카나를 보며 에이라나가 씨익 웃었다.
  "그 보답으로 내가 현경에 오른 깨달음의 결과를 보여줄게."
  그 말과 함께 에이라나의 은빛 검강에 변화가 생겼다. 진득한 마기가 같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눈을 부릅뜨는 모든 이들! 어떻게 한 검강에 두개의 기운이 생성된단 말인가?
  은빛가 검은빛이 꽈배기처럼 엉켜있는 에이라나의 검강. 계속해서 엉켜들면서도 반발하는 두 기운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든 이들. 모두가 에이라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이라나의 머리카락 또한 은빛과 검은빛이 섞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반반으로 나뉘어 검은빛과 은빛이 섞여 있는 머리카락. 그리고 왼쪽은 은안, 오른쪽은 흑안인 모습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에이라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죽어도 불가능했을 결과물이지."
  그건 당연한 거다. 어떻게 인간이 두개의 기운을 동시에 사용한단 말인가?
  "잘 막아."
  그 말과 함께 차가운 냉기와 진득한 마기가 섞여 진득함은 사라지고 대신 실버 일족의 뭐든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서렸다. 참 신기했다.
  에이라나가 중얼거렸다.
  "천마검 비기 천마!"
  쾅!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그리고 이어진 것은 폭격이었다. 검강의 폭격. 뭉게뭉게 피어나는 먼지와 사라진 먼지 사이로 보이는 로카나의 모습은 피투성이였다.
  "컥! 쿨럭!"
  이 세계에서도 검막은 있다. 물론 그랜드소드마스터의 능력이지만 말이다.
  로카나는 충격을 입은 듯 피를 토했다. 그래도 비무랍시고 급소를 피해 검강을 날린 게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로카나는 죽었을 것이다.
  로카나가 멍하니 에이라나를 바라보다가 풀썩 쓰러졌다.
  빠르게 로카나에게 달려드는 엘프들. 그리고 목숨에 이상이 없고 한 며칠 쉬면 괜찮을 것 같다는 진단이 나오자 모두들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 말로 엘프들을 슬프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초토화될 대로 초토화된 마을 근처의 숲이었다.
  거의 사막화, 황폐화(?)된 그곳을 보며 피 눈물로 며칠 동안 죽어라 절규하는 엘프들이었다. 하지만 이 원망의 화살을 돌릴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아픈 로카나에게 돌릴 것인가? 로카나가 원상태로 돌아온다해도 로카나에게 책임을 물릴 겁대가리를 상실한 엘프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엘프 마을에 매일 찾아와 천진난만하게 웃는 에이라나에게 돌릴 것인가? 그건 더욱 미친 짓이다.
  아마 그랬다가는...
  "뭐? 이 건방진 엘프들이 미쳤나? 감히 누구 딸에게 책임을 돌려?"
  하고 에랴나니스가 나서서 브레스를 뿌려 자신들을 얼음동상으로 만들 것이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숨죽여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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